낫고, 낳고, 나아가기
대학병원에서 보내준 문자안내를 따라 복도를 걷다 보니 ‘암병원’이라는 곳을 향해 화살표가 뻗어 있다. 내가 이 화살표를 따라 걷게 될 줄이야. 쓴 맛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쓰디쓴 맛의 끝에 따라온 것은 묘한 ‘안도감’이다.
요즘 나는 한 달간의 유급병가를 누리고 있다. 내겐 충분한 시간이 있다. 타인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운영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진짜 쉼으로 이끈다. 휴식을 찾아 해외로 도피하듯 떠나지 않아도 집구석에서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니. 돌이켜보니 이렇게 마음에 드는 안락한 속도를 경험하는 것은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 정도 속도로 천천히 걸으며 유머러스한 친구들과 농을 나누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충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30년이 넘게 세상을 살아오면서 처음 느끼는 편안함이라니, 적어도 암병원을 가리키는 이 '불쾌한' 화살표를 따라가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나는 ‘해야 한다’의 나라의 오랜 거주자였다.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모범적인 딸, 학생, 동료, 선생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 국가의 유일한 헌법인 ‘해야 한다’에 맞추어 일과를 보내고, 미래를 계획했다. 가족, 친구, 연인,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의 어미는 ‘해야 한다’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1년여간의 북유럽 유학시절 만난 선생님 한 분은 “너는 ‘Have to’를 정말 많이 쓰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의미심장하게 들렸지만 그때는 미처 선생님이 건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는 못했다. ‘해야 한다’라는 표현은 모든 행위의 기반을 의무와 책임에 둔다. 선택의 여지가 자동적으로 제거되는 마법의 표현이다. 삶이 메마를수록 일상 속에 난무한다.
얼마 전쯤 내 몸이 보낸 것 같은데, 이제야 뜯어본 퇴출 통지서에는 그만 됐으니 ‘해야 한다’의 나라에서 지금 당장 나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북미의 이름난 의료 사회학자인 아서 프랭크(Arthur W. Frank) 박사는 그가 심장마비와 암을 연이어 경험하고 난 이후 집필한 그의 저서,『아픈 삶을 살다』* 에서 아마도 우리는 오직 아플 때만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했다. 암이라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이 나를 이 나라에서 ‘퇴출’하기 전에 내 의지로 ‘해야 한다’의 나라를 떠날 수는 없었을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먼저 도착해 버린 입가가 눈치 없이 헤실거린다. 슬프지만, 다행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따금씩 귓전에 ‘해야 한다! 해야 해!’로 시작되는 ‘해야 한다’ 나라의 국가가 어른거린다. 이제는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해도 된다’ 그리고 '할 수도 있다'의 나라를 두루 여행하며 지내보고 싶다. 불현듯,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을 멈출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에 방금 들어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아서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봄날의 책, 2017,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