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내가 일하는 공방에는 사람들이 함께 돌보는 네 마리의 닭*들이 있다. 이들은 완전한 자연방목은 아니지만 동료들이 직접 만든 '꼬꼬댁'이라는 근사한 저택에 살고 있다. 햇볕이 잘 드는 커다란 창으로 신선한 아침 햇살이 깊숙이 드리우는 꼬꼬댁 내부의 풍경을 들여다볼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 출근길에 꼬꼬댁을 바라보고 서 있어도 도무지 평온해 지질 않는다. 이른 아침 병원에 들러 조직검사 결과를 듣고 왔기 때문이었다. ‘유방암만 아니면 된다'던 그 젊은 의사는 내게 결과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유감이라는 의사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었다. 예의 건조한 말투로 꽤나 자세히 무언가를 설명해 주었던 것 같은데 말의 힘이란 어찌나 센지, ‘유방암만 아니면 된다’ 던 말만 귓전에 웽웽거렸다.
내 삶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느라 잔뜩 심각해진 내 앞에서 꼬꼬는 내 누울 자리, 나 앉을자리, 소중한 내 알을 낳을 자리를 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드는 중이다. 바삭한 짚풀을 부리와 엉덩이로 오목하게 다듬은 꼬꼬는 그 자리에 엉덩이를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서 아늑한 분위기를 즐기는 듯했다.
그런 꼬꼬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어느샌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스스로를 대해온 방식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동안 내 것을 챙기느라 동분서주하며 고생해 왔다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무엇을 챙겨 온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아주 큰 오해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만 나이 서른하나에 들어선 나는 이제야 진짜 나를 챙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오늘 아침 꼬꼬댁에서 나온 알은 셋. 그중 한 알은 아직 따뜻했다. 온기가 달아날 새라 손바닥으로 감싸 가만히 느껴본다. 목을 움츠리고 햇볕 잘 드는 구석에 꼼짝 않고 앉아 꾸뻑 꾸뻑 조는 닭이 능청스럽다. 내가 “꼬꼬꼬꼬!” 우는 소리를 내자 귀찮다는 듯 눈을 슬쩍 떴다 이내 다시 감는 녀석. 꼬꼬는 이렇게 살아왔다.
*‘닭 대가리'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틀려도 한참은 틀린 말이라는 사실을 닭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일화가 있다. 추수날 타작을 끝내고 남은 짚풀을 한가득 얻어와 꼬꼬댁 마당에 쌓아둔 날이었다. 신이 나서 마른 짚풀을 쪼아대던 꼬꼬 한 마리가 목구멍에 짚풀 가지가 콕하고 박혀 도무지 빠지지 않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꼬아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 모습을 본 맞은편의 꼬꼬가 부리로 그 짚풀가지를 집어 쏙 빼내 주는 것이었다. 동료 닭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반응한 ‘명장면’을 포착한 나는 그때부터 꼬꼬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닭은 서로를 보살필 줄 아는 사회적 동물일 뿐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는 데에도 탁월함을 보이는 동물이다. 매일 깃털을 다듬고 정리하며 윤기를 내고, 모래나 흙으로 목욕을 하며 위생과 스트레스를 관리한다. 낮에는 꼭 햇볕을 쬐며 비타민 D를 보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