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고, 낳고, 나아가기
사람들은 아프다. 무한한 정신을 유한한 물질인 몸에 담고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경험, 그것이 바로 질병이다.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암 환자들도 안타까워한다는 ‘젊은’ 암 환자가 되었다. 막상 나 자신이 그들 중 한 사람이 되고 나니 서글픈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 질병 때문에 많은 것들에 의존하고, 도움을 받아야 했다. 진단부터 수술, 항암, 방사선치료를 아우르는 표준 치료의 전 단계를 거치면서 나는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놓였다.
‘암’이라는 주제는 사람들을 멈칫거리게 한다. 우리가 흔히 쓰곤 하는 ‘암적 존재’라는 관용적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대다수에게 암은 깜깜하고, 무섭고, 두려워서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주제다. 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어떤 사람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아 영 멀어졌다. ‘너의 성격과 기질이 암을 부른 것’이라는 비난을 위로나 조언의 탈을 씌워 건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한때는 사람들을 만나는 대화하는 일이 꼭 지뢰밭을 걷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낫는다. 질병을 겪는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것은 아픈 동시에 '낫는 경험' 또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암을 경험하기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실제로 나는 내 몸과 정신의 한계를 체감하는 동시에 강인함과 회복력에 대해서도 경험하게 되었다. 깊고 짙은 슬픔이 넘실거리는 바다에 휩쓸려 넘어지기도 하고, 포슬포슬 내리쬐는 햇빛 한줄기가 선사하는 벅찬 행복감을 순도 높게 만끽하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픈 시기를 적극적으로 살아낸 이들은 오히려 더 깊고 풍성한 가슴이 되어 이후의 삶 속으로 나아가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번의 암을 겪고도 87세까지 의욕적인 인생을 살았던 미국의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암 경험 이후의 삶을 향미 좋은 특별한 향신료를 듬뿍 친 것 같다고 표현하며 암을 겪는 것만큼 생존의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나는 암 진단과 함께 치료를 위해 완전히 멈출 수밖에 없었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가장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는 맑은 시야를 얻었다. 마치 요동치던 물의 표면이 충분히 잔잔해진 뒤에야 비로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보이는 것처럼, 진정 나 자신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마주한 몇몇 장면들은 치료가 끝나고 나서도 기억의 표피에 깊게 새겨진 타투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지우고 싶지 않을 만큼 내 삶에 있어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나는 잊지 않으려 글을 쓴다.
이 책은 내가 2018년 이른 봄, 갑작스레 유방암 판정을 받고 나서 겪었던 집중 치료 기간과 이후 5년여 간의 회복기에 적은 글들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 질병을 겪으며 '낫고', 스스로를 능히 돌볼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낳고', 다시 삶 속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비교적 인생의 이른 시기에 암 경험 이력을 지니고 나니, 이곳저곳에서 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람들의 소식과 함께 조언을 구하는 연락을 받곤 한다. 젊은 암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돌아보면 항암치료로 몸은 물론 정신과 입안이 까칠해졌을 때 가장 소화가 잘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 책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질병의 터널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 긴즈버그의 말, 마음산책, 2020,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