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샘이 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대중목욕탕에 갔다. 때를 밀려던 건 아니고 그저 뜨끈한 탕 속에 앉아있고 싶었다. 말하자면 물이 주는 위로를 받고 싶었달까. 아침 7시의 목욕탕은 한산해서 탕에는 어느 아주머니와 나 둘 뿐이었다. 아주머니가 일어나더니 바로 옆 냉탕으로 몸을 옮겼다가 다시 온탕으로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숱하게 목욕탕을 드나들었지만, 온탕과 냉탕을 들락거려 본 적이 없었다. 온탕은 그저 때를 불리려는 목적으로 갔을 뿐이라 기능적으로 온탕보다 못한 냉탕에는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급격한 온도 차이가 심장에 무리를 줄 것 같기도 하고 촐랑거리며 왔다 갔다 하다가 괜히 미끄러질 것 같기도 하고.
그날따라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탕에 앉아있으러 왔으니 좀 더 다채롭게 탕을 즐겨볼까 싶었다. 몸을 일으켜 냉탕에 다리를 담갔다. 온탕에 들어갈 때처럼 천천히 시도했지만 목까지 담그지는 못하고 나왔다. 수영장 물보다 훨씬 차가웠다. 찬 물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못 참고 다시 온탕으로 돌아왔다.
그때 알았다. 이 맛이구나. 이 맛에 냉탕 갔다가 오는구나. 아까는 뜨겁기만 했던 온탕이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할 수가 없었다. 잠깐 냉탕에 다녀왔던 경험 때문에 같은 공간에 대한 평가가 단숨에 달라졌다. 뜨겁다는 생각이나 답답하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신진대사가 원활해지고 혈액 순환이 촉진된다는 냉온욕의 이점이 이런 기분으로 발현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냉탕 덕분에 달라져버린 온탕에 대한 인상을 곱씹으며 해보는 생각은, 밍밍하고 지루한 줄 알았던 일상이 뜻밖의 어려움을 만나 그 가치가 급격히 격상한 최근의 내 경험이다. 뜨거운 여름을 견뎌야 가을 귀한 것을 알고, 혹한을 겪어봐야 봄햇살에 고마움도 느끼듯이. 행복과 불행도 서로 기대어 있다. 불행이 없다면 행복이라는 개념도 없을 테고 행복이라는 개념 때문에 불행은 더욱 불행이 된다.
건강검진 결과를 통보받은 다음부터, 아니 갑상선 결절 때문에 세침검사(얇은 바늘을 이용하여 병변의 세포를 검사하는 방법)를 받은 다음부터 나는 강제로 차가운 냉탕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일주일이나 걸린다고 말하면서도 “캔서(cancer) 같은데?”라고 혼잣말 같은 진단을 내려버리는 의사 앞에서 나는 어질했다. 불행은 이렇게 느닷없이 오는 것인가.
갑상선암 카페에 가입해서 종일 글을 읽었다. 누군가는 펑펑 울었다 하고 누군가는 착한 암이라 다행이라고 힘내자고 한다. 나는 울진 않았지만 ‘암’이라는 글자의 위압감 때문인지 겁에 질렸다. 암을 확진받았다는 글들 중에 10월에 작성된 것만도 꽤 많은 걸 보면 흔한 질병인 건 맞다. 설사 암이라고 해도 내 경우는 결절의 크기가 작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근데 그렇다고 해도 냉탕은 냉탕.
왜 하필 나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뭘 잘못했나? 같은 부질없는 생각이 파도처럼 거듭 밀려왔다. 알 수도 없고 안다 한들 이제 와서 소용도 없는 멍청한 질문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막연한 한탄과 쏟아져 내리는 걱정과 불안 속에 한 달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암이네요.”와 “암은 아니네요.” 중에 어떤 답을 듣게 될 것인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진료실에 들어갔다. 내가 의자에 앉자 의사는 입을 열었다. 재검이 필요하다는 소견이란다. 단번에 확진이 아니라는 사실에 희망을 가져야 할지 단지 표본량이 부족했을 뿐인지 알 수 없었다. 세침검사보다 더 아픈 검사를 받았다.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있는 곳이 온탕인 줄도 몰랐어. 차가운 냉탕 맛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지 뭐야. 이제 무탈한 일상에 그저 감사해하면서 행복하게 살 테야 식의 수다를 떨 수 있게 되길 기대했는데. 마취주사를 맞고 조직을 떼어내고 뻐근한 통증을 느끼는 것보다 멍청한 괴로움 속을 일주일 더 헤매야 한다는 사실이 훨씬 끔찍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하루 지나며 멍청한 괴로움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별일 없을 거라는 낙관이 승리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시간과 함께 조금씩 나아졌다. 온탕이든 냉탕이든 오래 있으면 온도에 적응이 되어 무디어지는 것처럼. 다행스럽고 놀라운 변화였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물론 가만히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수영을 하러 갔다. 암진단, 수술이 일상을 집어삼킬까 봐 두려웠는데 늘 하던 대로 자유 수영을 가서 열 바퀴를 부지런히 돌고 나왔더니 생각이 명료해졌다. 달라진 것은 결절이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는 것뿐이다. 몸 상태도 똑같고 나는 여전히 시간부자다. 확진을 받아도 의료대란으로 어차피 당장 수술을 받을 수도 없다. 그 사이 음악을 들으며 얼마든지 공원을 산책할 수 있다. 삶은 계속될 것이다.
브런치를 비롯해 여기저기에서 투병기를 비롯한 상실의 이야기들도 찾아 읽었다. 그들의 고통이 내 것보다 훨씬 무거워서가 아니라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틔울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걸 확인해서 크게 위로를 받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솔직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가 외롭게 밀려나버린 나에게 동아줄이 되었다.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과 연결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일어나 무릎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목적지까지 끝내 도착하고 마는 야밤의 운전수처럼 그저 눈앞에 닥친 필요하고 원하는 일들을 해치우면서 조금씩 나아가면 될 일이다. 그래서 전에 써놨던 엘리베이터에 얽힌 일화를 시작으로 가볍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막힌 타이밍'이라는 제목으로 내게 일어난 우연들을 나열하다 보니, 삶에는 우연이 가득하고 어떤 우연이든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입맛에 맞는 우연만 골라 담는 내 맘대로 패키지 같은 것이 아니니까. 냉탕이든 온탕이든 시간은 흐른다. 때는 불고, 마침내 목욕을 마치면 개운함만이 남을 것이다. (2024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