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지난 십수 년 간 매일 체중을 쟀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려고) 화장실부터 다녀온 뒤에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발을 딛고 숫자가 찍히기까지 짧은 순간 기대감과 걱정이 교차했다. 결과에 따라 반짝 기분이 좋아지거나, 반대로 기분을 잡쳤다. 고작 몇백 그램 차이인데도. 기대가 배반당한 날에는 식사량을 줄였고 심한 날에는 식사를 걸렀다.
체중을 매일 잰 이유는 당연하게도 날씬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치 불어난 살은 빼기가 쉬우니까. 매일 체중을 재다 보면 내 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도 했다.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으면 몸이 쉽게 불어나는지, 반대는 어떤 경우인지 수년간 체중계를 오르내리며 데이터를 쌓았다. 증량에는 떡볶이가 단연 으뜸이었고 감량을 위해 운동을 빡세게 한들 식사량 조절만 못했다.
날씬함은 내가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군살 없이 매끈한 몸은 잘 절제된 삶의 반영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게 매체의 영향이고 세뇌의 결과이며 억압을 낳는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직관적으로 '내 눈에' 이뻐 보이는 걸. 같은 옷을 입어도 몸에 따라 태가 달랐다. 장식이 없이 단순하고 기본적인 스타일을 즐겨 입다 보니 더 그랬다. 그러므로 거울에 비친 나를 더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좋아하는 옷을 기분 좋게 입기 위해서 날씬한 몸이 꼭 필요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늘 원하는 체중을 유지해 온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럴 리가. 아침마다 올라가는 체중계 위에서 나는 자주 애가 탔다. 아… 왜… 휴… 원하는 체중을 유지하는 시기에는 그게 당연한 것만 같다가, 그렇지 못할 때는 한숨이 나오도록 아쉬웠다. 나이가 들면서 체중 조절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살은 쉽게 쪘고 빼기는 어려운데 밥을 참기는 더 어려웠다.
그러다가 콜레스테롤과 혈당 이슈가 생기면서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다. 매일 ‘오늘 저녁엔 뭐 먹지?’ 하는 기대로 퇴근하던 삶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맘껏 골라서 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닌데 주제도 모르고 날뛴 게 부끄러웠다. 혀의 만족감에만 봉사하느라 장기와 혈관들을 망치고 있었다는 한탄도 밀려들었다. 눈에 보이는 몸매가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몸속의 무수한 혈관들을 신경 써야 했다.
하여, 지난 글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식습관을 고치려고 계속 노력 중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기분이 좋을 때,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스트레스받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맛있는 음식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해 내기가 아직도 어려우니까. 기분이 처질 때 달달한 커피 한잔이 주는 즉각적인 위로는 이미 아는 맛이라서 거부하기가 참 힘들다. 그래도 필요한 일이라서 꾸준히 해볼 생각이다.
식습관에 대한 고민과 다짐의 나비효과는 체중을 그만 재야겠다는 결심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체중계 위의 숫자만 보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자각의 결과였다. 체중과 직접적으로 연동된 칼로리나 식사량만 따지느라 건강한 식생활을 놓쳤다. 이제 체중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을 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래된 습관이던 체중 재기를 그만둔 지 벌써 넉 달째다.
처음엔 못할 줄 알았다. 조바심이 나서라도 전전긍긍하다가 다시 체중을 재게 되지 않을까 스스로를 못 미더워했다. 근데 아니었다. 날씬하게 사는 것과 건강하게 사는 것을 저울에 달아보면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 답은 쉬웠다. 어쩌면 이 참에 체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증을 느끼던 애인을 뻥 차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다.
헛똑똑이의 781번째 깨달음쯤 될까. 지금껏 순서가 뒤바뀐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건강한 식습관을 형성하고 그걸 꾸준히 지속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물이 바로 ‘내 몸무게’일진대, 반대로 이상적인 체중을 설정하고 그에 맞춰서 꾸깃꾸깃 즉흥적인 섭식을 해왔다. 오늘은 좀 무겁네 싶으면 ‘아무거나’ 조금만 먹고 체중이 좀 빠졌다 싶으면 다시 ‘아무거나’ 실컷 먹는 식으로.
앞으로는 아무거나 먹지 않겠다. 일단의 목표는 밀가루 음식은 최대한 자제하고 채소는 힘껏 먹기다.(채소 만세!) 달고 기름지고 짠 음식은 아예 안 먹고는 살 수 없으니 양을 적게 먹는 방식으로 대응해 볼 생각이다. 나도 안다. 마치 학생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해보겠다고 약속하는 것처럼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그래도 과거 수능 만점자들의 단골 멘트였던 걸 보면 누군가는 할 수 있는 일일 텐데, 그 특별한 사람이 내가 되면 안 될까?
‘단련’에는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한다는 뜻 말고도 ‘어떤 일을 반복하여 익숙하게 됨’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무엇을 입에 넣어야 하나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단련하는 태도로 임하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지금 단련 중이라고, 이렇게 계속 반복하다 보면 곧 익숙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궁금하다. 단련 끝에 만나게 될 내 궁극의 체중은 몇에 수렴할 것인가.
매일 재던 체중을 더 이상 재지 않겠다는 다짐은 이제라도 본질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보겠다는 선언이다. 오랜 집착을 내려놓고 어떤 결과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작은 행동에 큰 의미를 실어가며 호들갑 떠는 것이 나의 시그니처. 솔직히 말하면 살짝 기대도 없지 않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 철저히 하는데 설마 성적이 떨어지기야 하겠는가! (202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