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의 걱정병
어제는 갑상선암 수술 이후 첫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혈액검사를 해서 갑상선호르몬 수치를 살피고, 떼어낸 암세포에 대한 최종 조직검사 결과도 들을 예정이었다. 갑상선암 중에서도 더 독한 암이 있는 모양인데 거기에 해당되는지도 알려준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다시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재발 위험이 높은 독한 암이면 어떡하나‘ 가 첫 번째 걱정이었고 갑상선의 일부만 제거해서 호르몬 기능에 이상이 없을 거라고는 했는데 ’제기능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가 두 번째 걱정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을 겪으며 배운 게 없지는 않은지 불안은 금세 잡혔다. 재발하면 뭐, 다시 치료받으면 되는 것이고, 갑상선호르몬 수치에 문제가 있다면 약을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근데 문제는 스멀스멀 피어오른 세 번째 걱정이었다. 내용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데, ‘최종 조직 검사 결과, 암이 아니면 어떡하나’였다. 그러니까 이미 수술을 받고 흉터까지 생긴 이 마당에 ‘알고 보니 암이 아니었다’라고 한다면? 할 필요가 없었던 수술을 하고, 할 필요가 없었던 고생을 한 거라면? 남편은 “그럼 오히려 잘된 거 아니야?”라고 했다. ”내 몸에 암이 생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러면 얼마나 잘된 일이야? “라고 되물었다.
“잘되긴 뭐가 잘돼. 힘들게 수술을 받고 흉터까지 남게 됐는데.” 나는 울상을 지어 보였다. 내가 치른 가장 비싼 대가는 목에 난 수술 자국이었다. 암이 아니라면 꼭 필요한 수술이 아니었을 텐데 억울해 팔짝 뛸 노릇이었다. 게다가 암이라서 산정특례* 대상자가 되어 병원비도 많이 할인받았는데 암이 아니라면 다시 다 토해내야 한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다. 수술 자국을 안고 수백만 원을 병원비로 더 지불할 생각을 하니 너무도 아까웠다.
안다. 이건 거의 망상에 가까운 걱정이다. 세침검사와 중심침 생검, 유전자 검사까지 거친 후에 받은 수술이었으니 암이 아닐 리가 없다. 그럼에도 갑상선암 카페에 올라온 어떤 사연을 읽은 게 도화선이 됐다. 암인 줄 알고 수술을 받았는데 최종 조직검사 결과 암이 아니었다는 한탄의 글이었다. 소송을 해봤자 승산이 없다는 댓글도 줄줄이 달려있었다. 어머, 이 사람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공감은 어느새 나의 불안이 되었다.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을 두고 걱정을 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순간 내가 억울함과 분노를 실제로 느꼈다는 사실이다. 마치 나에게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진 것처럼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인간의 뇌는 실제 일어난 일과 상상한 일을 구별할 수 없다더니 정말 그랬다. 내가 이렇게까지 과몰입하게 된 이유를 찾는 일은 사실 어렵지도 않았다.
나는 보험회사에 암진단비를 청구할 생각이었다. ‘금융치료‘는 내가 겪은 고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일 터였다. C로 시작하는 질병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첨부서류로 제출해야 했고 그걸 수술 후 첫 진료일에 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과도한 걱정과 불안의 밑바닥에는 돈에 대한 욕심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다.
“오빠, 나 아무래도 암진단비에 눈이 돌아서 이런 엉뚱한 걱정을 하나 봐.” 솔직한 마음을 토로하자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생각해 봐. 진단 과정부터 수술까지 우리는 최선의 결정을 했고 좋은 병원, 좋은 의사를 만나서 일찍 수술까지 받았고.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설사 결과가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우리가 뭘 더 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편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야. 지금 이런 걱정하는 게 의미가 있어? “
남편의 말은 맞았다. 모든 선택은 최선이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고스란히 그대로 밟을 과정이었다. 남편 말처럼 모두 벌어진 일, 이런 걱정 따위는 나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명료한 사고를 하자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꼭 필요한지, 건강에 이로운지, 본질인지, 이 세 가지에 해당되지 않는 생각이나 고민은 다 쓸데없다는 게 최근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소파의 이쪽과 저쪽에 앉아서 나는 하잘 것 없는 걱정을 털어놓고 남편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기 생각을 말했다. 고마웠다. 나의 망상놀이에 박자를 맞춰주었다는 사실이. 되지도 않는 걱정에 진지한 대응을 해준 남편 덕분에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잠깐이나마 폭풍처럼 나를 쓸고 간 감정이 궁금해서 키보드를 펼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추가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이해였다. 나는 수술과 흉터라는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금융치료를 ‘보상’으로 여겼다. 당할 필요가 없었던 피해를 입었다거나,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못 받는 상황이 나의 ‘발작 버튼’이었다.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대처 방식이 불러온 불안과 걱정이었다.
물론, 전혀 옳지 않은 생각이었다. 나는 누구나 겪을 법한 경험을 했다. 벌어진 상황에서 가장 옳은 선택을 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내가 직접 내린 주체적인 것이었다. 선택의 결과일 뿐 대단한 피해가 아니었다. 제대로 계산을 따진다면 오히려 얻은 것이 훨씬 많은 ‘남는 장사’였다. 마음고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깨닫고 배웠다. 고치고 싶었는데 안되던 것들이 이번 기회를 만나 싹 바뀌었다.
채소 위주로 식습관을 바꾸고 밀가루를 끊다시피 하자 쉽게 살이 빠졌다. 안달복달해도 회복하지 못했던 코로나 이전 체중을 회복했다. 옷태가 전보다 더 좋아졌고, 새 옷을 기웃거리던 습관도 덩달아 사그라들었다. 음식을 먹고, 옷을 사는 데 작용하던 ‘충동’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되면서 내가 얻은 것은 ‘자기 조절감’이었다. 내가 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은 생각보다 무척 든든한 것이었다.
작년 추석, 가족들과 함께 밤바다를 보러 갔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새까만 밤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내가 빈 소원은 계속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였다. 소원빨이 제대로 먹혔는지 10월부터 갑상선암 익스프레스를 타고 브런치에 글도 부지런히 썼다. 자칫 흘려보내고 말 경험이 글을 만나 배움과 깨달음이 되었으니, 이걸 아는 내가 앞으로도 내내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은 자명하다. 소원도 이룬 셈이다.
피해를 입을까 지레 겁먹는 사람이 된 데에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살면서 두 번 정도 크게 덴 적이 있었다. 그때의 충격이 뼛속 깊이 각인된 모양이다.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일어나 속수무책이었던 아픈 경험. 근데 그 두 가지 일 역시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흔한 불행이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미 통과해 지나간 경험이었고 통과의 다른 이름이 ‘극복’이라면 거기엔 내 몫의 지분이 상당했다.
나는 반대로 내가 얻은 행운들을 떠올려봤다. 순식간에 일곱 개 정도가 후루룩 떠올랐다. 망상 놀이에 동참해 주는 좋은 남편을 만난 것도 행운에 포함되었다. 불행과 행운의 대결 결과는 2대 7이었다. 나는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공평한 걸 세상 좋아하는 내가 균형을 잃고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을 상상력 아니 망상력까지 동원해 일부러 보태가면서 말이다. 명백히 공평하지 않은 처사였다.
기대로 붕 떴다가 실망에 떠밀려 추락할까 봐 무서워서 나는 미리 최악의 경우부터 상상하곤 했다. 겁쟁이라서 그랬다. 이제 보니 그건 안전장치도 위안도 아니었다. 상상한 최악의 상황을 실제라고 착각한 나의 뇌는 진짜 분노와 괴로움을 일으켰다. 불필요한 고초였다. 자초한 진짜 ‘피해’였다. 스스로를 향해 독을 내뿜는 사이 가뜩이나 많지도 않던 내 에너지가 줄줄 새어나갔을 게 뻔하다.
조직검사 결과는 암이 맞았다. 다행히 별난 암은 아니고 흔한 유두암이었다. 다만 크기가 작았는데도 임파선에 일부 전이가 있었다. 갑상선 기능은 정상이었고 두 달 후 한번 더 검사를 하기로는 했지만 일단은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 반창고를 떼어내고 처음 마주한 수술 자국은 생각보다는 양호했다.
타고난 재능에 반복적인 훈련까지 더해져 나는 아마 앞으로도 종종 말도 안 되는 걱정을 사서 할 것이다. 이 글은 그날의 나에게 부치는 편지다. 내게 열어볼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데에 수술(흉터가 아닌)‘흔적’이 도움을 줄 것이다. 떨지 마. 걱정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더라도 결국 다 감당해 낼 테니까. 왜냐하면 감당하는 것 말고 다른 수는 없거든. (20250107)
*산정특례 제도: 진료비 부담이 높은 중증질환에 대해 환자가 납부하는 진료비 및 조제비 등을 경감하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