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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심신 단련 15화

너와 나의 열린 미래

침입과 초대 사이

by 박기복

제주 여행에서 있었던 일이다. 숙소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소리 없이 다가오는 통에 몇 번이나 놀랐다. 하지만 나는 동물에 애정이 없는 편. 무심히 지나쳤을 뿐이다. 그 와중에 ‘그래도 개가 아니라 고양이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개는 사람을 보면 다가오고 고양이는 사람을 피하니까. 그게 내가 개와 고양이에 대해 가진 상식이었다.


여행 마지막날, 아침 일찍 나서는 일행들을 배웅하고 혼자 숙소에 남게 됐다. 배웅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주 토실토실한 갈색 고양이였다. 달려오던 고양이는 내 앞에서 배를 보이며 드러누웠다. 어떤 의미를 담은 행동인지 몰라 당황스러운데 마침 전화기를 방에 두고 몸만 나온 참이라 물어볼 수도, 검색해 볼 수도 없었다. 내가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고 했더니 고양이는 다시 벌떡 일어나 내 앞을 막아섰다. 정확히는 내가 열려고 했던 현관문 앞에 같은 자세로 다시 드러누웠다.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나는 네가 뭘 원하는지 몰라.” 나는 어르듯이 말을 했지만 고양이는 ‘얼음’이었다.


사실 나는 고양이의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동물 친화적인 인간이라면 그 상황에서 자세를 낮추고 고양이의 배를 만져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물을 쉽게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고양이를 안아본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 그 낯선 느낌은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나에게 놀아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데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걸 어쩐담.


난감했다. 결국 그 고양이를 피해 일행이 쓰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와 보니 고양이는 현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고 나를 보고도 달려오지 않았다. 이미 나를 파악하고 기대를 거두어들인 것 같았다. 나는 다행이라고 안심하고는 그 일을 잊었다.


그날밤 김포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고양이를 검색해 봤다. 처음에는 포털 사이트에서 배를 보이며 드러눕는 고양이의 행동에 관해 탐색하다가 나중에는 유튜브에서 고양이를 검색했다. 숏츠를 몇 개 보다 말 줄 알았는데 웬걸. 세상에는 귀여운 고양이가 한없이 많았다. 고양이 얼굴을 빤히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던 건가. 쫑긋한 귀에서부터 시작해 총명한 눈, 도도한 수염, 야무진 입매, 보송한 털.


나를 가장 홀린 건 새끼 고양이를 입양해 집으로 데려와서, 키우던 강아지와 만나는 모습을 관찰한 영상인데 이미 조회수가 수천만 회에 달했다. 주먹만 한 고양이는 극강의 귀여움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원래 키우던 그 집 강아지도 못지않았다. 바짝 경계하고 있는 새끼 고양이에게 접근했다가 하악질에 흠칫 놀라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호기심 가득한 강아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고양이와 강아지의 귀여움 진검승부랄까. 물론 그들에게는 긴장 가득한 대치상황이었겠지만.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어쩌면 나중엔 집에서 동물을 키울 수도 있겠구나. 30분 남짓 미소를 거두지 못하고 영상을 본 뒤에 하게 된 생각이다. 사람은 외부의 자극이나 경험에 따라서 계속 변하니까. 본능에 충실하다는 동물조차 생활환경에 따라 고양이에서 '개냥이'로 거듭나기도 하는 것처럼, 동물에 대한 애정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동물을 키우며 노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내 미래는 열려 있다는 이야기.


열린 미래’는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을 읽고 마음에 품었던 네 글자다. 존엄성에 대해 다루는 그 책에서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반드시 허락해야 할 것으로 꼽은 것이 바로 열린 미래였다. ‘지금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이지만 나중에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사람(심지어 범죄자라 해도)을 바라보는 방식은 모두의 존엄성을 지탱해 준단다. 나와 당신의 ‘열린 미래’를 서로가 항시 염두에 둘 수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으리라.


그 열린 미래를 다시 곱씹게 된 것은 사실 고양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양이를 만나게 된 이번 제주도 여행은 남편이 제안한 것이었고 남편의 친구 두 명도 함께였다. 애초에 등산이 목적이었지만 나는 산행을 할 생각이 없었고 그들이 산행을 하는 몇 시간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근데 한라산 입산 통제로 오름을 몇 군데 다녀오게 되는 바람에 일행과 금방 다시 만났다.


점심때부터 술자리가 이어졌다. 제주도에 사는 남편 친구의 친구가 맛집이라고 데려간 곳에서 먹은 방어회는 살면서 맛본 모든 회 중 최고였고, 직종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도 나름의 즐거움은 있었다. 한동안 약을 먹느라 2주 만에 술을 마신 남편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졸고 있었다.


근데 술에 흥이 오른 그들이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골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장비도 뭣도 없지만 술이 불러온 자신감이었을까. 그렇게 되면 나는 분명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나에게 양해를 구하는 과정도 없었다. 남편은 이제는 아예 잠들어 있었다. 뭐지? 하다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이 되었다. 결국 제주도에 거주 중인 남편 친구의 친구가 어딘가로 연락을 하더니 덜컥 다음날 오전으로 골프장을 예약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술자리를 가질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했지만 낮술을 마시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골프를 치러 갈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취해 잠든 남편에 대한 원망이 들었다. 피해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 내내 불쾌해하다가 여행을 마무리했을 지도. 그러나 최근 나는, 내가 손해를 입는 상황에 예민하다는 것과 그게 나의 불안을 초래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불안은 비합리적인 걱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난 글 ‘걱정에 탁월한 재능이 있습니다만’을 쓰면서 정리된 바였다.


계속 불쾌함에 머물러 있는 건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골프를 계획하는 그 자리에 나도 있었다. 나는 의견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판을 깨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고 그건 결국 남편의 면을 살려주고 싶은 목적을 띤 행동이었다. 상대가 알아서 배려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사람마다 배려의 기준은 다르다. 어쩌면 상대는 술자리에 술도 안 먹는 채로 붙잡혀 있느니 자유시간을 갖는 게 배려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줘라’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 법륜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누군가 도움을 요청할 때 싫어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마음을 내면, 나는 끌려가는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된다는 게 요지였다. ‘그래,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섭섭해하고만 있으면 나는 고스란히 억울한 피해자가 된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자. 가고 싶은 데 가서 혼자만의 좋은 시간을 보내자. 그러면 된다. 이 경험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앞으로 살면서도 잘 적용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다음날 아침, 일행을 배웅하고 (갈색 고양이와 잠시 실랑이를 한 뒤에) 슬슬 준비를 했다. 종달리에 있는 책방을 두 군데 들를 계획을 세웠다. 혼자 차를 몰고 숙소를 나서서 동쪽으로 향했다. 날씨가 아주 좋았다.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파란 하늘을 보니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자유의 맛을 느끼며 막히지 않는 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제주에 올 때면 종종 들렀던 '소심한 책방'을 찾아 책을 몇 권 사고 근처에 있는 '카페 책자국'으로 향했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늑한 공간에서 홀로 두어 시간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셨다.

@카페 책자국

2박 3일의 여행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다. 좋은 책을 골라 읽어서, 커피 맛이 기가 막혀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데 대한 만족감의 결과였다. 나는 스스로 피해자의 자리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그간 내가 자주 빠져들었던 익숙한 길을 이번에는 피했다. 내게 벌어지는 상황들에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었는데 나는 자주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렀다.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는 불쾌해했다. 불운을 탓하거나 자책을 하거나 남을 탓했다.


기분 좋은 자유 시간을 보내고 다시 일행과 만나 점심을 먹고 몇몇 관광지를 돌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여행이 어땠냐고 남편이 물었다. 골프 예약을 잡았다는 걸 알고 난 후 난감해하며 내 눈치를 보던 남편이었다. 나는 '좋았다'라고 답했다. 내가 발견한 남편 친구들의 장점을 담백하게 늘어놓고는, 근데 관심사가 확연히 다르니 앞으로 이런 조합의 여행은 오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남편은 내가 직접적인 불평의 말을 하지 않자, 안심한 눈치였다.


나는 변화를 꿈꾸면서도 안정을 원하는 모순된 욕망을 가지고 살았다. 새로움을 찾아 일을 벌이면서 늘 계획했고, 결과를 미리 예측했다. 아니, 예측한 결과에 따라 계획을 했다. 결과를 예측하고 계획을 했으니 말하자면 나의 미래는 닫혀 있는 셈이었다. 뜻밖의 결과를 반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부딪혀보지도 않고 단정했다. 세찬 바람은 싫고 따뜻한 햇살만 들어오길 바랐다. 호오와 시비를 숨 가쁘게 가려내면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 전전긍긍한 끝에 도착한 곳은 스스로가 밀어 넣은 불안 속이었다. 좋고 싫은 게 분명할수록, 옳고 그른 게 중요할수록 삶은 무거워졌다.


미래는 애당초 닫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극, 경험, 만남에 의해 사람은 변한다. 질병, 사고, 상실, 실패도 사람을 들쑤신다. 예측은 자주 틀린다. 사람은 안 바뀐다는 말도 있지만 금세 변하는 게 또 사람이다.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죽는 순간까지 변화의 여지는 있으니 열린 미래는 산 자의 숙명이다.


다만, 억지로 문이 열리면 ‘침입’이고, 스스로 열면 ‘초대’가 된다.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자는 열린 미래라는 ‘파티’의 주최자가 될 것이다. 반대로 불청객이 올지 몰라 문고리를 붙잡고 불안에 떠는 사람은 죽기도 전에 이미 당도한 지옥을 경험하게 될 터.


파티의 주최자가 되는 법은 간단하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는 반응을 선택할 충분한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좀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제야 자유의 맛을 본 나는, 순한 눈을 뜨고 미래로 향하는 열린 문을 바라볼 생각이다. (202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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