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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심신 단련 17화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내가 틀릴 수도 있어요. 실은 자주 틀려요.

by 박기복

며칠 전부터 오른쪽 눈 아래가 뻐근했다. 눈꺼풀 안쪽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이 딱 봐도 다래끼였다. 작년에 왼쪽 눈의 다래끼를 우습게 알았다가 일주일 넘게 고생을 했던 터라 이번엔 미루지 않고 바로 병원에 갔다. 명절 연휴를 앞둔 토요일의 안과는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무려 1시간을 기다렸다가 겨우 진료를 받았다. 온찜질을 열심히 하라는 당부에 믿음직한 고갯짓을 하며 병원을 나섰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향했다. 6층 건물에 층층마다 병원이 있는 탓인지 건물 1층에 있는 약국은 규모가 꽤 컸다. 넓은 벽면마다 약이 꽉 들어차 있었고 손님들이 대기하는 공간에도 낮은 진열대가 여럿 줄지어 있었다. 각종 밴드, 비타민, 영양제 등등 신기한 게 많아서 마트에 온 듯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처방전을 제출하고 약국 안을 거닐며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지난번 방문이 생각났다.


때는 작년 봄, 역시 눈다래끼 때문이었다. 집에서 꼬박 15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라서 안과 때문이 아니고는 올 일이 없는 약국이었다. 처방전을 제출하고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며 진열대 앞을 서성였다. 약국에서만 볼 수 있는 신기한 물품들을 구경하다가, 물에 넣기만 하면 자연스레 녹아서 간편히 음료수처럼 마실 수 있는 ‘발포비타민’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남편을 위해서였다.


전에 내가 어디선가 받아온 것을 냉동실에 넣어두었는데 남편이 종종 꺼내서 물에 녹여 마시던 게 생각났다. 달달하고 톡 쏘는 맛이 탄산음료 같아선지 꽤나 착실하게 꺼내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편을 위해 발포비타민 한 통을 챙겼다. 퇴근한 그에게 오다 주웠다 느낌으로 무심히 건넸다. 회사에 두고 먹으라는 말과 함께.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저번에 준 비타민 이상하더라며, 물에 넣어도 안 녹아서 결국 버렸다고 말했다. 유통기한까지 확인하고 샀는데 하필 불량품을 사게 된 것이 속상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며칠 전, 약이 나오길 기다리며 같은 자리에 서 있는데 마침 바로 그 불량한 발포비타민이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으니.


내가 발포비타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산 그 제품 아래로 ‘포도당 캔디’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발포비타민은 그 아랫줄에 있었는데 두 제품의 통 모양이 너무 같아서 나의 오해는 터무니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버젓이 설명이 있는데, 멀쩡한 사탕을 발포비타민으로 오해하고 샀단 말인가. 그래놓고는 물에 안 녹는다며 불량이라 타박했다니.


대충 보고 산 나도 문제지만, 용기를 잘 보면 아주 작은 글씨로나마 포도당 캔디라고 적혀있었을 법도 한데 (굳이 확인을 한 것은 아니다.) 싶다가도, 탓하려면 남편의 부주의가 아니라 노안을 탓해야 할 것이라 원망도 접어두었다. 나는 다만 ‘아차’ 싶었다. 나이 든 사람이 더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있다면 이런 종류가 아닐까 하는 경각심이 일어났던 탓이다. 바로 ‘지레짐작’ 말이다.


나는 플라스틱 원기둥의 겉포장만 보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먹어본 발포비타민과 외양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상식으로 사탕은 봉지에 들어가 있을 일이지 이런 통에 들어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잠시 주의를 기울여 진열대에 붙은 몇 글자만 읽었어도 좋았을 텐데. 변명이지만, 얄궂게도 제품 겉면에는 건강 제품에 뻔하게 등장하는 변별력 없는 영단어만 크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가 먹어봐서 아는데, 이거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하는 자기 과신에 기반을 둔 지레짐작. 이런 오류는 나이 든 자가 더 쉽게 빠질 수 있으리라. 살면서 경험치가 쌓이고, 자신의 경험을 신뢰(를 넘어서 맹신)하게 된 덕분이다. 자기 과신이야말로 ‘꼰대’를 규정하는 제1의 특성이던데.(나무위키 참조)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맞다며 우기는 고집스러운 기성세대를 향해 조용히 눈을 흘기던 내가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 가고 있나 씁쓸했다.


눈은 콕콕 쑤시고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브런치북 <심신단련>의 글감 하나는 건졌네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근데 무슨 조화인지 같은 날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비슷한 경험을 또 하게 되었다. 안과에서 오는 길에 집에 있는 남편을 불러내 집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제 돈가스 맛집인 그 식당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그날따라 한산했다.


키오스크로 메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내 뒤로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아들이 온 모양인데 아이가 말이 아주 많았다. 아이가 혼자 떠들면 아버지가 오냐오냐 받아주는 식이었다. 식당에 사람이 별로 없다고는 해도 아이의 목소리가 과하게 컸다. 의아했다. 아버지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았고 아이는 계속 조잘조잘 떠들었다. 초등학생쯤 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가 또 지레짐작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이에게 무슨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는 몸을 돌려 뒤를 돌아다봤다. 아이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나는 모든 것이 이해가, 아니 양해가 됐다. 아이는 이제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였다. 볼때기가 빵빵하고 일자로 깎은 앞머리가 인형 같은 작은 아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말을 너무도 유창하게 잘했다.


만일 내가 굳이 아이 모습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을 내 멋대로 오해하고 말았을 것이다. 목소리만으로 지레짐작한 것을 알아챘을 때, 잇따른 두 사건의 우연성에 깜짝 놀랐다. 나의 ‘지레짐작’을 고쳐주려 신이 작정하고 맴매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 쓰고 싶지만 신이 그리 한가할 리는 없고. 당장은 글의 재료가 될 에피소드를 두 개나 확보하고 든든해졌다. (일주일에 고작 짧은 글 하나 연재하는 데도 이렇게 에피소드에 집착할 일인가.)


남은 돈가스를 입안에 넣으며 아직 시작도 안 한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했다. 나이 타령으로 글을 맺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총체적 지레짐작이 될 터였다. 나이라는 핑계 뒤로 숨을 일이 아니었다. 판단을 쉽고 성급하게 하는 나의 특성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이다. 남편하고 시시콜콜하게 시비를 가리는 일이 잦았던 게 이제 보니 재미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일 수 있었다.


착각은 착각에서 깔끔하게 끝나지 않고 오해와 원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위험하다. 물건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사놓고서는, 약국에서 불량품을 팔았다고 오해했다. 저가였기에 망정이지, 포도당 캔디를 들고 약국으로 달려가 이거 왜 녹지 않는 거냐며 따지기라도 했으면 개망신을 톡톡히 당할 뻔했다. 그간 알아차리지 못하고 쏘아댄 원망의 화살이 몇 개였을까 생각하면 뒤통수가 따가워지는 기분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해야겠다. 습관 만들기 단계에서는 나이 타령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나이가 든 탓에 틀릴 일은 더 많아진다고, 경험에 속지 말고, 떨어지는 기억력에 겸손해지자고 말이다. 곧 복직을 앞두고 있어 마음이 더 결연해진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어야겠다. 실수가 없을 수는 없지만, 충분히 제어가능한 성급한 실수들을 허락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모르는 것이 많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정말로 체화된다면, 타인의 실수나 오류에도 더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될 터다. 뇌의 기능적 특성상 타인에게 너그러운 이가 자신에게 너그럽지 않을 리 없으므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은, 틀리면 절대 안 된다는 강박이 아니라 (노력은 하겠지만) 실수하더라도 자책하지 않는 마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겸손은 힘들지만, 분명 미덕이다. (2025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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