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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심신 단련 19화

성형수술이 어때서

나와 너의 욕구를 이해하는 일(feat. 엄마의 말하기 연습)

by 박기복

소파에 누워서 티브이 채널을 넘기는 도중, 안 보던 프로그램을 잠시 보게 됐다. 한 남자 연예인이 가족들과 함께 등장하는데 언뜻 봐도 상당한 성형수술을 거친 얼굴이었다. 마침 성형 전 사진이 화면 가득 채워지고 수술로 인한 외모변화가 아예 예능의 소재로 소비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저렇게 성형을 과하게 했을까, 생긴 대로 살지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을 텐데 느닷없이 새로운 생각 하나가 끼어들었다. 수술대 위에 눕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데, 얼마나 변화가 절실했으면 저렇게 여러 군데 성형 수술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그러자 같은 사람이 달라 보였다. 외모에 집착해서 무리한 수술을 감행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절실히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소리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생각에 스스로도 당황스러웠지만 그 힘은 셌다. 성형에 관해 그간 품었던 편견이 단숨에 깨졌으니까.


미남, 미녀 소리를 들으려 여기저기 성형 수술을 감행하는 일을 나는 폄하했었다. 빼어난 외모로 관심을 받은 유명인이 알고 보니 타고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성형 미인이었다면, 어쩐지 속은 기분이 들었고 자존감 운운하며 그 내면까지 깎아내리려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형수술로 미녀로 거듭나는 사이에 평범한 내 외모가 더 열등(?) 해지는 게 싫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외모를 가지고 순위를 매긴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글러먹은 건데 그건 넘어가더라도, 외모가 우열을 가릴 기준이 될 만큼 중요하다면 자신의 외모를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개인의 노력을 숭배하는 이 능력주의 시대에 말이다.


한국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 풍조나 성형 중독에 빠져 어려움을 겪는 사례는 분명히 우려할만하다. 하지만 성형수술이나 성형 미인 자체를 함부로 평할 일은 아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고스란히 모든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니까. 성장을 향한 절실한 노력을 두고는 칭송하면서 어째서 얼굴을 변화시키려 수술대 위에 눕는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깎아내렸을까. 반성한다.


공개 사과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욕구’에 관해서다. 성형수술에 대한 생각의 변화는 ‘타인의 욕구를 이해함으로써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경험’ 일 텐데 마침 이 무렵,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책을 만났으니, 친구의 추천으로 읽은 <엄마의 말하기 연습(박재연, 2018)>이다.


공감 대화의 기술을 알려준다고 표방하는 이 책에서 특히 와닿았던 대목은 ‘욕구’를 이해하는 게 대화의 핵심이라는 사실이었다. 타인의 행동을 비난하기 전에 관찰을 통해 상대와 자신의 욕구를 헤아림으로써,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일’(즉, 관계를 단절하는 대화)을 멈출 수 있다는 거다.


상대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평화로운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체적인 행동의 관찰이 이루어져야 하고,
관찰에 대한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느낌을 가져오는 욕구를 파악한 다음,
자신의 요구를 상대에게 요청(부탁)하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엄마의 말하기 연습> 중에서


저자가 우선 강조하는 것은 판단이 아닌 관찰을 하라는 이야기다. 관찰을 통해 타인의 행동 이면에 감추어진 욕구를 알아차리면 대화는 비난과 공격으로 점철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고 근원을 찾다 보면 본인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게 된다는 거다. 이때 감정은 관찰이 필요하다는 ‘알람’ 역할을 하고 끝내 자신의 욕구를 찾는 여정을 돕는다.


엄마가 만약
자기감정이었던 걱정과 초조함의 원인을 자기의 욕구(가르침-아이가 균형 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 지도하기)가 충족되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면, 최소한 아이를 탓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엄마의 말하기 연습> 중에서


욕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기에 이해와 공감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충족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욕구 자체는 트집 잡을 수 없고, 그 욕구가 중요하다는 마음만 이해해 줘도 대화가 한결 편안해질 수 있다는 얘기는 십분 이해가 된다.


비록 내가 충족시켜 줄 수는 없다고 해도 ‘너는 그런 욕구가 있어서 그렇게 행동했구나.’라는 이해의 필터를 거치고 나온 말은 비난이나 공격과는 다를 것이다. 결국 상대의 욕구를 인정한다는 건 그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존중’ 일 터였다.


전에 글로 쓴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우리는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욕구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꿈꾸는 존재’로서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좁았던 내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걸 느끼는 일은 여전히 벅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에 관해 곱씹다가 도달한 지점은 당연하게도 ‘나의' 궁극적 욕구였다. 요 며칠 궁리한 끝에 ‘기쁨과 평화’라는 답을 얻었다. 내가 실패를 두려워하는 건 명예나 영광을 탐내서가 아니라 ‘평온’을 위해서다. 자괴감이나 죄책감 같은 감정이 나를 휩쓸고 가지 않도록. 그러니까 나는 대단한 소유나 큰 성취가 없이도 충분히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크게 아프지 않고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 아침 공기를 마시며 하는 산책 속에, 몸에 좋은 걸 챙겨 먹는 건강한 식생활 속에, 종종 수영장에 가서 자유형으로 10바퀴를 돌고 나올 때에, 설레는 옷을 사 입는 와중에, 나의 기쁨과 평화가 있다. 우연히 만난 좋은 책을 친구에게 추천하고, 글을 썼다 지웠다 해가며 발행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 나는 진실로 기쁘고 평온하다.


더불어, 나는 기쁨과 평화를 해치는 가장 큰 적 또한 알아버렸다. 근거 없는 걱정과 지나가버려서 이미 어쩔 수도 없는 일에 대한 후회, 자신에 대한 원망 같은 반복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그중 으뜸은 단연 ‘비교’인데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다 자신을 소진시킬 고약하고도 친밀한 적이다.


가끔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나의 기쁨과 평화를 자발적으로 해치며 살고 있었던 탓이다. 욕구를 이해하니 길이 보인다. 그럴싸한 욕망이 아닌 나의 ‘기쁨과 평화’로 난 길을 걷고 싶다.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기는 어렵지만 떠오른 생각을 멈추는 건 도전해 봄직하다. 물론, 생각을 멈추는 건 관찰과 알아차림이 상시 가동되어야 가능한 일. 나의 심신 단련은 그 세계에 있다.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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