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있나요?
박기복이 별다른 기복 없이 꾸준히 해오고 있는 일 중 하나가 새 옷을 사는 것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나날이 새로워지고 싶은 나는, 가장 확실하고도 쉬운 선택을 한다. 일단 새 옷이라도 걸쳐 새 기분이라도 느껴 보는 거다. 야심 차게 새로 산 옷을 선보이는 나를 향해 남편은 매번 같은 질문을 한다. “어? 그거 있던 거 아니야?”
말하자면 고만고만한 옷들을 새 옷이랍시고 자꾸 사재낀다는 건데 옷에 관해 진작에 몇 편의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충동적인 옷쇼핑 습관을 고치기는 쉽지 않았다. 입기만 하면 나의 모든 신체적 단점을 커버해 주면서 이지적이고 우아해 보이는 그런 옷을, 나는 찾아 헤맸다. 그건 마치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이나 용을 찾아 헤매는 허황된 행동에 가까웠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다행히 요즘 옷쇼핑에 대한 충동이 줄었는데 식탐을 다스리게 된 게 유효했다. 식탐에 끌려다니지 않는 ‘주인의 삶’을 사는 기쁨(이름하여 ‘자기 조절감’)을 다른 영역으로도 확대시킨 덕이랄까. 갑상선암 이슈로 맑아진 눈이 그간 못 보던 걸 보게 했다. 자주 들락거리는 의류 사이트의 옷들이 죄다 이뻐 보였던 이유는 저 깡마른 모델 언니가 입어서였고, 우리 집 옷장에 있는 옷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살이 빠진 덕에, 있던 옷들을 꺼내 입어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유니콘을 그만 좇기로 했다.
그리하여 무려 3개월 동안 옷을 사지 않았다. (내게는 흔치 않은 일!) 더 이상 옷쇼핑 충동에 휘둘리지 않는 자신이 무척 기특했다. 긴 공백을 깬 건 겨울 외투가 ‘필요’해서였다. 주야장천 몇 개의 패딩만 돌려 입고 다니다가 좀 차려입은 듯한 외투가 입고 싶어졌다. 곧 복직을 앞두고 있으니 그런 외투를 사는 건 엄연히 필요의 영역이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될 무렵 남편과 함께 가까운 아웃렛을 방문했다.
선호하는 브랜드 딱 몇 군데만 둘러볼 작정이었는데 늘 통했던 그 전략이 전혀 안 통했다. 그날 나는 옷을 몇 벌이나 입었다 벗었다 했지만 결국 빈 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마음에 들까 말까 하는 옷은 있었지만 쏙 드는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저냥 적당한 옷을 사려고 보니, 외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새 옷을 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 실패가 달콤했다. 나의 쇼핑 기준이 상향(?) 조정이라도 된 것처럼 으쓱했다. 나는 이제 호락호락하지 않아, 아무거나 침 흘리며 사지 않지! 그럼에도 겨울 외투를 향한 열망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인터넷 쇼핑몰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명절에 친정 부모님을 뵈러 서쪽으로 가는 김에 이번에는 멀리 파주에 있는 아웃렛을 찾아가기로 했다.
주차 행렬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엄청난 인파를 헤치며 외투를 찾아 나섰다. 저번처럼 몇 군데만 돌아보는 게 아니라 웬만하면 다 들어가 볼 작정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코트였다. 패딩이든 모직이든 울룩불룩하지 않고 툭 떨어지는 스타일을 원했다. 옷걸이에 걸린 모양만 봤을 때는 괜찮은가 싶어서 몸에 걸치고 거울 앞에 서면, 옷 탓인지 내 탓인지 죄다 영 아니었다. 매력적인 옷들은 이미 다 팔려나갔나 보다(내 탓은 아닐 거야) 정신 승리를 곁들인 체념을 하고 있던 그때, 드디어 그 옷을 발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근처의 섬 이름을 땄다는 그 브랜드로 말할 것 같으면, 한때는 자주 입었으나 언제부턴가 발길을 끊었던 곳이었다. 가성비가 좋지 않고 여성스럽고 아기자기한 스타일이 가끔은 촌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연이은 실패로 이미 오기가 생겨나고 있었기에 오랜만에 발을 들였고, 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것저것 입어보다가 마침내 그 옷을 만난 것이다.
여러 색이 섞인 체크무늬 코트였는데 내가 선호하는 모양의 카라인 데다가 툭 떨어지는 핏이라 낙낙하지만 부하지 않았다. 모헤어 소재로 니트 하나 걸친 듯 가벼웠다. 야들야들하고 고급스러운 섬유의 감촉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눈썰미가 좋은 남편의 의견을 나는 존중하는 편이다. 남편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어로 굳이 바꿔보면 ‘딱히…’ 정도가 될까. 보통 때였다면 별론가 싶어 슬쩍 내려놓았을 텐데 이번엔 아니었다. 난 또렷한 확신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하는 나와 뚱한 남편을 번갈아 보던 직원이 말을 보탰다. “저희 브랜드를 남자분들은 원래 별로 안 좋아하세요. 고객님이 마음에 들면 그냥 하세요.” 남편의 판단을 아예 선택지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노련한 수였다. 근데 그런 말이 아니었어도 이 옷을 살 참이었다. '심봤다'라도 외칠 듯 단호한 나의 태도에 남편도 적당한 타협을 해주었다. 그거 할 거면 저 색보다는 이 색이 낫네.
그렇게 코트를 사서 밖으로 나왔다. 70퍼센트나 할인된 가격이었다. 더없이 흡족했다. 만족도를 10점 만점으로 환산한다면, 최소 9점은 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입어보고 거울 앞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타인의 인정 따위 상관없는 순도 높은 만족감이었다. 나는 유니콘 운운 한 것 치고는 우습게도, 보통 7점 이상이면 옷을 샀었다. 인터넷으로 산 옷은 5점만 되면 반품 없이 그냥 입었다. 그런 옷을 입을 때는 타인의 인정이 중요했다. 새 옷을 산 걸 알아봐 주고, 이쁘다고, 잘 샀다고 말해주기를 기대했다.
온전히 흡족한 선택 앞에서 타인의 인정은 그저 ‘부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댕’하고 쳤다. 내가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주 타인의 시선에 연연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중요한 건 자기 확신이었다. 나는 이 느낌을 꼭 기억하기로 했다. 옷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은 육체로 오는 감각이었다. 만족감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왔다. 그 느낌의 정체를 아는 단어 중에서 골라보려 애쓴 끝에 찾아냈으니, 바로 '설렘'이었다.
일본의 정리 전문가인 ‘곤도 마리에’가 옷 정리법으로 제시한, 설레지 않는 옷은 버리라는 처방을 나는 신뢰해 왔다. 벌써 십 년도 넘었다. 내가 가진 옷들을 모두 꺼내 바닥에 쌓아놓고 하나씩 양손으로 잡아 올리며 나는 몇 초만에 판단할 수 있었다. 설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오롯이 직관에 의존한 판단 끝에, 입으면 기분 좋은 옷들만이 살아남았다.
설레지 않는 옷은 버리라는 조언은 단순히 옷 정리법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기도 했다. 곁에 무엇을 둘지, 뭘 남기고 뭘 버릴지 취사선택하는 일들 속에 삶이 있으니까. 근데 그 기준인 ‘나의 설렘’에는 남의 인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한때 유행했던 ‘가슴 떨리는 삶을 살라’는 말과도 비슷한 맥락이었는데 핵심은 (타인이나 사회가 아닌) 자신이 만족하는 선택을 하라는 의미일 터다.
그러나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만 아는 나는, 설레는 옷을 남기려고만 했지 애초에 설레는 옷을 사려고 의도하지 않았다. 버릴 때에는 양손으로 붙잡고 옷과 교신하며 설렘을 따지는 내가, 옷을 구입할 때는 조건만 따졌다. 가격과 사이즈, 퍼스널 컬러, 체형 같은 것들 말이다. 왜 그랬냐면, 옷을 사는 일이 내게는 지극히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값비싼 옷을 사는 것도 아니라서, 옷을 구입하는 경로는 늘 가깝고도 손쉬웠다.
남편을 보면 아직도 설레냐는 질문에, “십 년 넘게 매일 보는데도 두근거림을 느낀다면 심장 이상을 염려해봐야 한다 “는 대답이 웃기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건, 익숙하고 일상적인 일에서 설렘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이다. 설렘은 비일상의 영역, 이벤트의 세계에 있다!
하여 이 글을 쓰면서 옷쇼핑을 일상이 아닌 이벤트의 세상으로 보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아무 때고 불쑥 클릭해 (설렘도 없는) 그저 적당한 옷들을 장바구니에 담지 않기로. 기준을 높이고 빈도를 조절함으로써 옷을 사는 일의 위상을 '특별한 사건'으로 바꾸어 놓기로. 그러면 이번처럼 거울 앞에서 나홀로 히죽대며 간질간질한 기분으로 10점 만점에 10점! 을 외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얼마 전 친구에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케이크로 행복해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는 저번보다 더 크고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이고 두 번째는 케이크가 먹고 싶어도 참았다가 며칠 뒤에 먹는 것이라고. 이 이야기의 방점인 두 번째 방법을 듣고 격한 호응을 했다. 어제보다 더 크고 맛있는 케이크를 무한정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자주 먹으면 물리기 마련이니까.
결국 (설렘 발생률을 높여주는) 이벤트의 필요조건은 기다림! 옷 구입이 ‘사건’이 되기 위해 내게는 어느 정도의 기다림이 필요할지 고민해 본다. 계절이 바뀌는 정도면 어떨까. 곧 찾아올 봄은 기꺼이 기다릴만하면서도 꽤나 감격스러우니까. 따뜻한 햇살과 바람이 봄꽃을 틔우는 계절에 어느 쇼핑몰 구석에서 달뜬 표정으로 ’심봤다‘나 ’유레카‘를 외치는 나를 상상해 본다. 누구의 인정이나 확인도 필요치 않은 순간, 나는 더없이 의기양양할 것이다. (2025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