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과 결과, 상관없음?
이번 주는 1차 지필평가 기간이었다. 내가 맡은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은 이틀간 다섯 과목의 시험을 치렀다. 수행평가의 비중이 커져서 100점 만점인 점수가 실제로는 20~30%만 반영됨에도 지필평가에 대한 관심과 긴장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더 높은 점수를 얻으려, 교사들은 오류가 없는 무탈한 고사를 염원하며 시험을 준비한다.
역사 시험은 꽤 쉬웠던 모양이다. 일부러 쉽게 내려고 의도하기는 했지만, 시험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찾아와 싱글벙글 자기 점수를 자랑하는 걸 보니 내가 우주평화에 크게 기여한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는 한데, 너도나도 다 잘 봤다고 하니 너무 쉬웠나 살짝 머쓱하기도 하다. (그러나 서술형 평가를 채점해 보고 머쓱함은 넣어두기로 했다.)
점수를 잘 받은 아이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자기 점수를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은 꽤나 사랑스럽다. “이게 나야.” 같은 말들을 해대면서 높아진 자존감을 발산하는 장면을 보면, 역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 때’ 빛이 난다는 생각이 든다. 시험점수 하나로 한껏 자신을 좋아하게 된 아이를 보는 일은 눈부시다. 그러나 세상에 어디 빛만 있을까.
시험 첫날, 두 명의 아이가 엉엉 우는 걸 목격했다. 시험을 망쳤다는 게 이유였다. 그중 한 명은 우리 반 아이였고, 이미 한 차례 울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종례를 마치고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 앞에서 또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거다.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집에도 안 가고 울고 있을까 싶어 딱한 마음이 들었다.
잠도 안 자고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망쳐서 너무 속상하다며 아이는 눈물을 쏟았다. 나는 할 수 있는 조언들을 늘어놓았다. 이번 지필평가에서 몇 개 더 틀린 게 너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네가 열심히 노력한 거 그게 값진 거다. 그거 어디 안 간다. 이렇게 우느라 내일 시험 준비할 시간을 빼앗기는 건 너무 아깝지 않느냐 같은 말들을. 어느 대목이 마음을 건드렸는지 아이는 금세 눈물을 멈추고 진정된 상태로 자리를 떴다.
내가 아이한테 늘어놓은 말은 모두 진심이었지만, 실은 진짜 진실은 빼먹고 말했다. 그건 아직 중학생이 알기엔 너무 잔인한 진실이라서 차마 대놓고 뱉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어른들은 다 짐작할만한 그것. 바로,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노력에 배신당한 아이 앞에서 노력이란 뾰로롱 요술봉도, 어느 문이나 열 수 있는 마스터키도 아니라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그나마 공부는 양반이다. 노력이 어느 정도는 작용하니까. 그러나 온마음을 다해 상대에게 정성을 쏟는다고 사랑이 결실을 맺는 건 아니고, 건강 관리에 최선을 다해도 중병을 피한다는 보장은 없다. 변수는 갑자기 튀어나와 일을 그르친다. 세상은 내 의도대로 절대 움직여주지 않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어도 별 수 없다. 인생은 확정이율을 약속하는 정기예금이 아니니까.
그러니 열심히 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억울해하는 건 아이에게나 허용되는 행위이다. 원금보장 안 되는 투자상품에 가입해 놓고는 수익이 마이너스가 된 게 말이 되냐며 은행 창구를 뒤집어 놓아 봤자 보는 이들의 혀만 쯧쯧, 바쁘게 만들 뿐이다. 실은 내가 바로 그 진상 고객이었다.
‘하면 된다’라는 말이 통용되는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열심히 하면 다 잘될 거라는 순진한 믿음을 움켜쥐고 살았다. 매일같이 밤 10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해야 했던 시절, 반 친구 하나가 설사가 심해 자습을 빠지겠다고 했더니 당시 담임선생님이 했다는 말은 우리 반에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설사를 참는 것도 정신력이야!”
설사까지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기본값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다. 그래서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 분통을 터뜨렸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을 두고 애를 끓였다. 마치 콘크리트 벽과 씨름하며 진을 빼는 격이었다. 안 써도 될 에너지와 감정이 습관적으로 낭비된 셈이다.
과거 어느 토크쇼에 아주 유명한 야구 선수가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투수로서 슬럼프를 겪었는데 어느 날 생각을 고쳐먹고는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단다. 공을 던질 때 상대 타자가 어떻게 칠지까지 생각하지 말고, 나는 그냥 최선을 다해 어떻게 던질까만 생각했다는 얘기였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는 건 고대 로마에서 유행한 스토아 철학의 귀띔이기도 하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내 마음가짐과 언행뿐이며 그 외에는 무엇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거다. 그러한 지혜를 갖추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용기, 절제, 정의를 발휘하거나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현대인에게도 유용하다.
글을 쓰는 동안 생각난 건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급훈이 '진인사대천명'이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니 지금껏 떠든 얘기를 축약한 여섯 글자다. 울던 아이보다 한참 언니였던 열아홉의 나는 급훈 액자를 매일 보면서도 과녁의 중앙을 맞추려는 기술을 연마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노력하기만 하면 천명을 약속받는 줄 착각하며 살았던 거다.
진인사대천명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도 '진인사'에만 방점을 찍었던 십 대의 박기복은 자라서 이제 '대천명'에 담긴 함의를 안다. 삶은 내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의 일을 다했어도 하늘의 뜻이 없을 수 있다. 노력과 결과 사이 필연은 없다. 노력은 내 통제 안에 있고 천명은 통제 바깥의 것이니, 노력이 내 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결과는 '받아들임'의 영역! 노력과 결과는 아예 카테고리가 다르다.
그렇다면 다시 울고 있던 아이에게로 돌아가 보자. 아이가 첫 번째로 갖추어야 할 것은 결과(성적)를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지혜'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떼쓰거나 눈 흘기지 않을 수 있어야만 가능한 얘기다. 지혜를 탑재한 아이가 갖추어야 할 다음 덕목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태도’다. 들이부은 노력이 때론 과녁을 벗어난 화살처럼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에 인생의 숭고함이 있지 않을까. 그 순간 삶은 성장이자 도전이 된다.
그러나 내가 다시 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우는 아이에게 노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말을 차마 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노력을 요술봉쯤으로 마냥 신뢰해야 하는 시기도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맡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놓아준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알아채듯, 노력이 결코 마스터키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사람의 일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딱 거기까지라는 사실을 배우는 순간이 그 아이에게도 찾아오기를 기원한다. (2025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