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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과 추억, 상관없음

프롤로그

by 박기복

며칠 전 아침, 나는 출근준비를 마치고 여러 벌의 옷들을 커다란 쇼핑백에 욱여넣었다. 몇 년 전 비싸게 주고 샀지만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아서 입지 않던 옷들, 온라인으로 싸게 구입했으나 결국 성에 차지 않아 입지 않던 옷들이 곧 수거함에 버려질 예정이었다. 옷을 버릴 때면 홀가분함을 느꼈다. 옷을 치워버림으로써 (사실은 아니지만) 나의 잘못된 선택은 없었던 일이 되고, 구매에 대한 후회로부터도 자유로워지니까.


그런데 옷더미 속에는 과거 한 시절 나의 총애를 받으며 줄기차게 선택당했던 외투들도 몇 벌 포함되어 있었다. 현명한 구매이긴 했으나 유행이 지나가버려 지난 수년간 그 자리에 걸려만 있었던 그들을 나는 쉽사리 버리지 못했었다. 한때 그들이 누린 영광은 곧 내 선택이 옳았다는 증거였고 옷에 묻어있는 추억 때문에라도 쉽게 내칠 수가 없어서였다. 영광과 추억의 후광 덕에 ‘설레지 않는 옷은 버린다’는 기준을 통과했으니 그들의 잔류는 물론 정당했다.


매번 그 혹독한 ‘옷 버리기 서바이벌’을 통과했던 그들을 이번에는 내놓게 된 것은 당연히 마음의 변화 때문이었다. 문득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입지도 않는 너희들을 옷장 안에 언제고 보관할 수 없다는 단호하지만 솔직한 마음이 차올랐다. 한때 잘 입었던 옷이라는 영광을 가진 것과, 그 옷을 두고두고 보관하는 것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기도 하다


옷장은 꺼내 입을 옷을 보관하는 장소이지, 박물관도 기념관도 아니다. 옷을 남겨두는 것 말고도 추억을 간직하는 다른 방법은 많다. 가령 사진을 한 장 찍어둔다거나 일기에 짧게 기록을 남겨둔다거나. 빼곡하게 옷이 들어찬 옷장 속에서 유물처럼 자리만 보전하고 있던 그들을 마침내 끄집어냈을 때 느낀 건 개운함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영광과 추억 같은 것에 기대지 않아도 내 삶은 끄떡없다고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결연한 기분이었다.


역사를 전공하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아서 그런지 나는 과거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다. 사는 게 힘에 부칠 때면 과거의 한 줌 영광 같은 것에 의지했고 현재의 불행을 놓고서는 과거의 선택에 그 책임을 과하게 전가하곤 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과거와 현재 사이에 그렇게나 큰 상관이 있을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 말고도, 고정관념에 젖어 응당 상관있다고 여겼던 것들 사이가 정말로 그런가? 의문을 품고 나니 몇 가지가 수상해 보이기 시작했다.


'A면 B'라고 굳건히 믿어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 작은 전구를 켜는 일과도 같다. B를 얻기 위한 방법이 A밖에 없다고 믿는 자의 종종거림에서 해방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불을 켤 생각도 못한 채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만을 좇으며 살아온 건 아닐까. 누군지도 모르는 이가 만들어놓은 어두운 방에서 벌을 받듯이 견디면서?


하여 나는,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마음으로 ‘상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상관이 없는 것들’을 찾아나가 볼 생각이다. 이 브런치북 역시 촘촘한 계획을 안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글의 여정이 어디에 닿을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믿는 구석은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은 흐르고, 새 옷은 이내 낡아지고, 매력 넘치던 디자인은 묘하게 촌스러워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새 옷이 필요하다. 처음 사는 인생, 처음 맞이하는 매 순간을 살아낼 새로운 생각의 틀이 필요한 것처럼. (202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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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