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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Oct 17. 2018

대학 동아리의 늦깎이 신입생

영락없이 게으른 몸치 문과생이었는데!

대학 동아리의 늦깎이 신입생

어쩌다 검도를 시작했어요?
여자가 격투기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송년회 자리에서 받은 질문이었다. 주최자 외에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는데 ‘검도하는 사람’이라는 내 말에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안경 쓰고 수더분한 표정에 별 말 없이 앉아 있어서였을까? 검도 외의 취미를 돌아보면 그림과 글쓰기처럼, 움직임과 한참 거리가 있은 것들 뿐. 그러다보니 이런 질문을 받으면 왠지 납득하고 만다.


인생의 시계를 14년 전 대학생 시절로 되돌려볼까. 대학교 1학년에 가입하는 동아리의 문을 2학년이 되서야 두드렸다. 취직 관련 대외활동 동아리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만화 동아리도 아니었다. 몸 움직이길 매우 귀찮아하는 내가 선택한 건 운동, 그것도 꽤 격한 무술인 검도였다. 장비 없이 몸만 움직이는 것도 힘들텐데 도구까지 사용하는 무술을? 고등학교 만화부 시절 죽도 가방을 매고 다니던 선배 탓이었나. 같은 대학교에 합격하면 검도부에 들자던 친구도 있었다. 비록 그 친구는 합격하고 나는 떨어졌지만. 14년 전의 머릿속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기억의 파편들이 검도라는 좌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몸을 움직이는 건 매우 귀찮지만, 당시에는 꼭 몸을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었다. 머릿속을 무겁게 누르던 갓 스무살 무렵의 고민들을 떨치고 싶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서툴고 어려웠고, 그런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던 시간. 혼자 멋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위안하는 게 버릇이었다. 몸은 안 움직이는데 머릿속만 분주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공상에 푹 빠졌던 주인공 월터 같았달까.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의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머리 속만 바쁘면 우울한 감정은 더욱 커진다.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다.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동아리에서 검도의 기초동작을 배운 후 호구를 착용해 대련하는 법을 배웠다. 조금이라도 운동 센스가 있기를 바랐지만 스스로에 대한 기대는 ‘혹시나’에서 ‘역시나’라는 좌절로 이어졌다. 동기들과 대련하면 잘 지는 쪽이었이다. 공격 기회를 어떻게 만들지 매 순간 자세는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배우는 속도가 더디면 좀 어떤가. 수련에서 즐거운 나만의 포인트는 분명 있었다. 격하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온갖 상상과 걱정으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사람 대하는 게 서툰 내가 누군가와 몸을 부딪히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도 내심 놀라웠다. 죽도를 쥐고 있으면 먼저 말 걸지 않아도 누구든 내 앞에 섰다. 서툰 말조차 꺼낼 필요 없었다. 몸을 부딪히며 대련하면 그걸로 충분했으므로.


그렇게 검도를 계속한 지 14년째. 5급으로 시작했던 나는 지금 5단 준비를 앞둔 4단이다. 사회생활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그렇게 오래 하면 젓가락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거냐"고 묻는다. 그렇진 않으니 내가 젓가락 한 쪽 들었다고 긴장하지 마시길. 여전히 대회에 나가면 1회전 탈락 단골이지만 이젠 ‘항상' 그렇진 않다. 때로는 3~4회전 정도까지 올라간다. 구 단위 대회, 딱 한 번이지만 시 대회 개인전 입상도 해봤다고! 


검도하며 마음이 성장한 부분도 있지만 냉소적인 마음도 있다. 죽도를 쥐고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마냥 고마움을 느끼진 않는다. 그들 중 누군가는 무례하거나 비겁했고, 그런 상대 모습에 화가 나 힘껏 기합을 내지르며 응징하는 나날도 있었다. 그래도 검도를 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사람들과도 예전보다 길게 이야기나누는 게 가능해졌다. 이쯤 되면 14년 전 격투기를 택한 여학생이 나름 늠름하게 컸다고 해도 되겠지. 


검도를 오래 했지만 어떤 순간에는 여전히 무섭다. 게다가 인간은 성장만 하지 않더라. 뒷걸음질치는 자신을 알아채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는 다시 중심을 잡아야 한다. 뒷걸음치는 나를 마주하는 게 검도의 매력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점점 나아지는 내가 되고 싶어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도장에 간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일로 채워진 일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로 보내는 시간. 몸을 부딪히며 힘껏 소리지르는, 삶을 몸의 감각으로 바꿔주는 활동. 검도는 내게 그런 의미다.


오늘도 부족한 부분을 연습해야지. 노력이 쌓인 시간을 정직하게 모아 한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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