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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19

어쩐지 해버린 느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





나와 오래 수련하던 사람들은 다 안다. 내가 몸치라는 사실을.


"로봇이냐? 뻣뻣해!" 입상했던 어느 시합에서의 관장님 피드백이 생생하다. 호구를 쓴 채 긴장한 내 머리를 두 손으로 휭휭 돌리며 긴장감을 풀어주신 건 (왠지 웃기고) 감사했지만(오래 마음한켠에 간직하고 있어요). 내 시합이 찍힌 영상을 보면 부끄럽다. 얼어붙은 발과 엉거주춤해보이는 상체가 눈에 확 들어와서다. 마음 약한 쫄보가 시합에서 얼어붙는 걸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나도 자연스러운 타이밍과 부드러운 발동작, 탄성 있게 튀어나가는 두 팔로 상대방의 머리 정중앙을 정확히 때리는 순간이 있다. 시합 때보다는 긴장이 덜 되는 평소 수련에서 이런 몸짓이 나온다. 오랜 수련이 타고난 몸의 뻣뻣함마져 서서히 무마시키는 경지에 이른 건지도 모른다(절대 사라진다는 표현은 쓸 수 없다).


잘은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타이밍, 내 몸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던질 수 있는 발과 허리의 작용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렇게 쳐내야지’ 하고 노렸다기 보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내 몸이 뭔가를 해내버린달까. 이럴 때는 사고회로가 머리 아닌 몸에 달린 듯하다.


수련의 어느 순간 감각적으로 적절한 움직임을 해버리는 몸. 이에 대해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주말 수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도장에 종종 찾아오는 중년 남자 선배와의 대련. 상대나 나나, 서로의 정중앙을 노려 머리치기 공격을 위해 동시에 몸을 던진 상태였다. 그 잠깐의 순간. 상대의 몸이 움직임을 일으켜 내쪽을 향해오던 찰나, 죽도를 쥔 내 손이 상대의 죽도를 살짝 옆으로 비꼈다.


미세하게 벌어진 상대의 죽도는 곧 확연히 중심을 벋어났다. 상대의 머리 위에 큰 공터가 생긴 것처럼 느껴졌고.. “팡!” 커다란 소리와 함께 상대의 머리 정중앙에 내 죽도가 정확히 꽂혔다. 손끝에 느껴지는 명확한 타격감. 손부터 상체, 곧 몸 전체로 퍼지는 그 확신의 순간. 상황을 글로 설명하니 읽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실제로는 1초 남짓의 찰나였을 것이다.


굼뜨다고만 생각했던 몸인데. 이런 걸 자연스레 해낸 게 내 몸이라니. 대견해! 초 단위의 상황에서 ‘상대의 죽도를 제끼고 친다'는 두 가지 동작을 연결해 해낸 내 몸을 칭찬하고 싶어졌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검도의 공격기술 중 하나인 ‘제치는 머리치기(일본어로는 払い面: 하라이 멘)’ 기술이라고. 습관적으로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상대가 공격하러 앞으로 나오는 찰나, 상대가 움직임을 일으키는 그 순간에 쓰기 좋다. 이 글을 보는 검도 숙련자가 있다면 나중에 시도해보셔도 좋겠다.


평소에 연습하던 기술이 나온다거나, 혹은 연습하진 않았더라도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공격이 몸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걸 구현하는 본인에게도 참 신기하고 생생한 감각이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가능할까. 어떤 기술은 ‘언젠가 이걸 꼭 써먹어야지' 하며 따로 연습을 해야 겨우 써먹게 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딱히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오랜 기간의 연습 과정에서 그 기술을 써낼 수 있는 체력과 감각이 상황과 조합을 이뤄 불쑥 튀어나온다. 하지만 우리가 하길 원하는 뭔가가 꼭 원하는 순간에 원하는 방식대로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그 확률을 높일 방법은 필요하다.


“큰 압박감을 몸으로 맛보게 하고 그에 저향력을 기르는 건 정말 좋은 훈련법이이에요.”


트위터에서 운동 계정을 하는 분이 올렸던 멘션이 마음에 크게 와닿았다. 그렇다면 대련은 마치 일종의 가상게임 같다. 싸움의 상황을 마주하기. 그 긴장감을 자꾸 마주하면서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내 마음과 몸이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늠하고 그에 따른 대처법을 실행하는 과정. 반복 끝에 해낼 수 있는 일들의 가짓수를 늘려가는 것. 결국 꾸준한 싸움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은 뭐라도 해내고 만다.


마음이 당황하지 않으니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게 되고 어떤 위기 상황에 내 자원을 끌어쓰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을 우리는 성장이라 부르고, 그렇기에 검도에서건 일상에서건 ‘도전’이 될 만한 어떤 상황 앞에 계속 자신을 내어놓는지 모른다.


격투기는 상대와 마주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공격기술을 해냈을 때의 쾌감이 강하다. 두려움을 지닌 나를 넘어서고 나아가 상대에게 가닿는 것.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하고 번거롭게 느껴지는 과정이지만 성공이던 실패던 ‘그 상황에 맞는 어떤 움직임을 할 줄 아는 나'와 만나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나는 검도라는 격투기를 통해 그 기분을 압축해서 느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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