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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19

오래된 인연, 연인

같은 취미를 공유하며 교감하는 관계


사실 사람을 만날 때 낯을 많이 가린다.


직업상 사람을 만나 인터뷰 하는 일을 종종 하지만, 그런 데서는 ‘사람을 좋아하는 인격’을 연기하는 감이 있달까. 글쓰기 일을 해온 영향인지, 상대가 쓰는 말(이를테면 조사 ‘~는’과 ‘~도’의 쓰임에서 은연 중에 드러나는 인식차를 느낀다)에 담긴 편견이나 선입견에 대해 민감해진다.


상대가 무례한 말을 한다면 입은 가만히 있을지언정 표정이 손으로 왕왕 구겨버린 신문지처럼 변하는 나.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얘기되는 게 포커페이스인데, 도무지 내 몸과 마음은 월급과 상관없는 순간에 연기를 못 한다.


이런 내가 검도를 수련하면서는 그동안 잘도 여러 사람을 만났다. 회사생활만 했다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직군의 사람들. 경찰과 교사가 많은 일본 검도선수들을 떠올리며 막연히 아마추어 검도인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검도하는 사람들의 직업군은 내 예상을 뛰어넘어 훨씬 다양했다. 이렇다 해도 검도 자체가 인지도 낮은 운동인지라 도장 밖에서 검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는 참 드물지만.. 아무튼 검도계 안에서 사람들의 직업은 꽤 다양하다.


만났던 사람들의 직업을 떠올려본다. 시장 상인부터 무역회사 직원, 학원강사, 가수, 시민활동가, 일용직 노동자, 보험 판매원, 프로그래머까지. 삶의 배경이 다른 이들이 검도라는 운동 취미를 통해 모이곤 했다. 검도는 몸을 부딪혀가며 어울리는 무도다. 때로 친밀도의 상승 속도가 춤을 출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서로 열심히 수련한 채 시간이 흐르면 서로 대화하는 게 쉬웠다. 그렇게 말 주변 없는 내게 학교 선생님, 자영업자와 검찰 수사관 등 여러 직업의 인연이 거쳐갔다.   


그중 제일 오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은 기계 만지는 일을 하는 엔지니어인 애인이다(도장을 안 갔다면 나는 취재 대상이 아닌 이상 엔지니어를 만날 일이 없다). 대학교 2학년 때 첫 도장에서 운동을 시작한 날. 도장 문을 열었을 때 삭발한 남자가 거울을 노려보며 자세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여기 도장은 스님도 검도하나봐.” 들었던 생각은 이게 전부였는데 그 스님같은 사람과 10년 넘게 연애한다. 지금은 그 사람 머리를 길렀지만...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다.


보통의 연애는 데이트를 위해 한껏 꾸민 모습부터 시작할텐데. 우리는 상대가 제일 못 생겨지는 순간부터 공유했다. 검도 호구를 착용하고 멋지게 수련하는 이미지는 드라마나 만화 속 이야기일뿐. 현실의 검도는 머리에 쓴 호면과 면수건을 벗으면 헝크러진 머리카락과 진동하는 땀냄새로 오감이 혼미해진다. 어쩌면 빼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서로의 눈에 들어온 걸 수도 있겠다.


"도장에서 땀 흘리는 모습 말고 예쁜 옷 입고 만나면 좋을텐데." 우리 두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일하느라 데이트는커녕 수련 시간도 부족한 것을. “우리는 수련이 데이트지 뭐.” 그런 생각으로 같은 도장을 다닐 때는 거의 매년 대중적인 이벤트인 크리스마스 이브나 두 사람의 생일을 도장에서 맞이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연애감정은 수련의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간 전우애에 가깝다. 수련 도중 내가 어딘가 다치면 반창고와 연고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 시합장에 가서 둘 중 한 명이 선수로 출전할 때 시합 관련 내용들을 찬찬히 챙겨주는 사람. 가장 좋아하고 오래 하고 싶은 취미를 굳이 이해시킬 필요 없는 관계다.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같은 편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공유 영역이 검도 외적인 것들로 확장될 수록 서로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도 많았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가장 잘 챙겨주는 응원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근거리에서 내게 상처주는 말을 남기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연쇄작용을 정말 오랫동안 겪으며 느낀 점은 이것이다. 이 실패와 성공을 넘나드는 관계의 끝이 어떻게 될까.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많은 인내를 통해 이 관계를 지키려 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그런 인내력은 훈련을 참아내는 태도와 연관이 있는걸까). 어른이 되서 만난 대부분의 관계는 서로에게 실망하고 손 놓게 되는 과정이 참 빠르게 진행됐는데, 이 사람과는 그 과정의 감정 진폭이 꽤 크면서도 여태껏 손을 놓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같이 늙어버린 시간의 힘이 작용하는 느낌도 든다.


그리고 이건 사족인데, 혹시 격투기를 같이 수련하는 애인을 둔 사람이라면 화해하지 않은 상태로 대련해보는 것도 할 만하다. 감정이 쌓인 상태로 “이야아아압!” 기합을 내지르며 대련하는데 서로 내뿜는 박력이 엄청나서다. 만화 드래곤볼에서 나오는 전투력 측정 장비 스카우터를 낀 상태였다면 빠른 속도로 수직상승하는 전투력 숫자에 질렸을 듯. 서로 꼴보기 싫은 다툼의 상태라도 서로를 대면하고, 보호구를 낀 상태에서 안전하게 때리고.. 왠지 때리는 소리가 평소와 다른 묵직함과 박력이 꿈틀대고... 손끝에 느껴지는 어마무지한 타격감과 몸받음의 둔탁한 감각.. 음.. 사랑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과 대련하면서 느끼는 점인데 좀 억울하다. 10년 이상 운동을 하면 애인을 이길 줄 알았는데! 상대를 이기기가 여전히 어렵다. 내가 수련해온 시간 만큼 그도 수련하니 어쩔 수 없나? 그래도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나아졌는데 한대는 좀 때려야 할텐데. 다른 검도 모임에서 만난 검도 커플 중 여자분에게서 비슷한 한탄을 들었다.


언젠가는 그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성공시킬 날이 오겠지. 혹시 이 인연이 결혼까지 이어진 상태에서 싸울 일이 생긴다면 죽도로 정정당당하게 대련해도 되겠다.


모쪼록 긴장하시라,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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