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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an 13. 2019

값진 2승

만년 1회전 탈락의 늪을 벗어난 순간

밥벌이하는 성인의 검도덕질은 녹록지 않다.


일의 양은 왜 그리 많고 급하게 처리할 일은 얼마나 많은지. 몸도 마음도 항상 쫓기는 듯,  도장에 들어서면 물기 빠진 오이지처럼 축 늘어진 채 수련하는 나날. 덕분에 시합장에서는 부족한 운동량 때문에 자신감도 없고 자세도 엉성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긴장한 몸을 움직이다가 결국 지고 나온다.

엉성하고 꼴사나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건만, 주말에 회사 일이 터져도 어떻게든 시합에 나가는 오기를 부리곤 했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시합장에 들어가 지고 나오는 일. 그건 사실 몹시 쪽팔리고 안 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밥벌이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못 하니까 억울해.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놓고 싶지 않아!”

게다가 사람 마음이란 게 괜한 기대를 품게 되기도 한다. 자꾸 시도하다 보면 운수 좋은 날이 있을 거란 기대감.  긴장도 덜 하고 자세도 잘 나오고 대진운도 좋은 날이..(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있을지 몰라. 내가 그 순간을 모르고 지나치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그래. 시합의 결과란 나가봐야 안다. 그날의 내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몇 년 전 시합을 앞두고, 그때의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내용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같은 심정으로 시합 신청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신청자 정보를 입력한 후 선수 등록 완료 버튼 클릭. 사회인 검도대회 개인전 출전 등록을 마쳤다. 이렇게 올해도 시합을 질렀구만. 

달리기나 수영처럼 검도도 아마추어 대회가 꾸준히 열린다. 작게는 구 단위로, 크게는 시나 전국구 차원의 대회가 있다. 시합장에 가면 검도가 비인기 종목임에도 참여자가 많다는 데 놀라고, 진지한 시합을 펼치는 아마추어 분들을 보며 직업선수 못지않은 그 열정에 자극받는다. 생계나 집안일에 치이면서도 짬을 내 수련해왔을 사람들.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면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검도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으면 좋은데, 시합을 앞둔 몸 상태는 시들시들했다. 거듭된 야근 탓에 연습량이 부족한 것은 물론, 일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3~4kg 빠져 있었다. 이런 상태로 전국 규모의 대회에 출전한다는 것. 1회전 상대가 몸을 풀도록 스파링 파트너가 돼준 후 광속 탈락하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살신성인 인지도.

마음은 간사하다. 적당한 포기의 이유를 찾는다. 할까? 하지 말까? 할까? 역시 하지 말까? 그래도 도전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실패 경험치라도 쌓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거보다 낫다. 무엇보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에게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었다. 시합장에 갈 때마다 멋지게 입상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저만큼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던 마음. 그 사람들과 나의 차이가 얼만큼인진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좁혀보고 싶은 마음. 스스로의 엉거주춤함 탓에 욕심을 드러내는 게 조심스러웠지만, 나도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시합 당일. 시합장에 도착하면 의례 하는 루틴대로 움직였다. 일단 대진표 책자를 받고 책을 펼쳐 내가 해당하는 조의 시합 코트 번호와 대진표를 확인한다. 검도 시합은 보통 토너먼트로 진행되는데 대진표의 위에 이름 적힌 사람은 청띠를, 아래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백 띠를 등에 단다. 나의 이번 시합에 매달아야 할 띠는 청색. 호구를 착용한 후 청띠를 등에 달고 내 차례가 될 때까지 해당 시합장에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시합에 대기하기 위해 기다리는 선수들을 보며, 시합 운영을 하는 스텝들은 대진표 팸플릿을 열심히 체크하면서 출전자 이름을 불렀다. 보통 약속시간에 잘 늦지 않지만 이런 때는 성질 급한 오소리처럼 빨리 시합장에 내려가 자리를 지키며 스텝들의 출석체크에 응답했다. “이상미 씨!” 할 때 “예 여기요!” 하고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스텝들은 기권으로 보고 대진표 상의 내 이름을 펜으로 쭉쭉 그어댈 거였기 때문이다. 

어느덧 내 차례였다. 앞서 진행된 개인전의 선수가 뒤로 물러서서 나올 때 서로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인사했다. 시합장에 들어서니 주임심판 1인과 보조심판 2인이 두 손에 청색 깃발과 흰색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시합장의 선 끝에 서서, 거기서부터 작은 보폭으로 두 걸음. 그다음에는 들고 있던 죽도를 허리에 차고 다시 크게 세 걸음. 마지막 세 걸음 째에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어 상대방의 정중선을 겨눴다. "시작!" 주임심판의 외침. 시합시간은 3분. 3판 2선 승제다. 2점을 먼저 따내거나 시합 종료 시점까지 1점을 앞서면 이긴다. 


가빠지는 호흡과 뻣뻣하게 굳은 몸. 분명 내 몸인데 로봇처럼 딱딱해져서는 마음대로 안 움직인다. 긴장감 때문에 호면을 쓴 시야가 더욱 좁아졌다. 운이 좋으면 긴장감에 익숙해져 시합을 잘 풀어낼 수 있고 안 그러면 속절없이 상대에게 순식간에 맞고 나온다. 압박감이 강할 때면 이렇게 생각해버리곤 했다. “차라리 나를 빨리 때려. 이 시합장에서 나가고 싶어.” 이런 식으로 지레 포기하는 마음이 분명 있었는데, 그날은 그러기 싫었다.

다행히 허리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 정도 몸 상태면 좀 더 버틸 수 있어. 찰나의 순간 살짝 보이는 상대의 빈틈. 몸을 앞으로 내던지며 "머리!" 기합을 내질렀다. 빗맞은 느낌에 연속 공격으로 한번 시도한 머리치기 공격이 들어갔다. 그렇게 1점을 득점. 그 채로 실점 없이 끝까지 버텨낸 첫 시합이 끝났다. 쫄보인 나. 야근에 찌든 나. 이런 내가 패배의 늪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온 순간. 여러분, 1회전 탈락 단골이 광속 탈락을 면하는 행운의 날을 맞이했지 뭡니까!

이 시합 영상을 찍은 거 보면 분명 나중에 엉거주춤한 모습에 이불 킥하고 싶어 지겠지만... 그래도 긴장감이 성취감으로 이어지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날의 시합은 부전승을 포함해 4회전까지 치렀다. 두 번 이긴 것에 이렇게 기뻐할 수 있나 싶지만, 이긴 스스로의 모습이 이렇게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걸 어쩌겠는가. 다른 코트에서 심판을 보고 계시던 도장 관장님한테 달려가 해맑은 표정으로 자랑했을 정도였다("관장님...! 저 4회전까지 시합 뛰었어요!" "오. 그래? 잘 했네."). 

긴장감의 고개를 거듭 넘기며 몸에 성취감을 각인시킨 날. 확실히 거듭 시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분명 있는지 모른다. 다음엔 좀 더 잘 해내고 싶어졌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을 좀 더 자신있게 내뱉어봐야겠다. 


할 수 있다. 쫄보인 나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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