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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Oct 22. 2024

이 맛있는 걸 안 먹으면 당신만 손해

바비큐는 축제의 장이다. 모든 사람들이 숯불을 둘러싸고 이야기를 나누며 술과 고기를 먹는다. 남아공의 브라이도, 아르헨티나의 아사도도, 자메이카의 저크치킨도. 지구 어디에서나 바비큐란 떠들썩한 가족 행사다.      


하지만 바비큐 파티는 고기를 굽는 사람이 대화에서 소외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존재감이 강렬한 사람이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당신이 내성적인 편에 속한다면 그저 고기 굽는 로봇 그 이상이 되긴 어렵다. 그마저도 ‘어이어이, 나와 봐 내가 구울게! 고기는 말이야, 이렇게 굽는 거야!’라는 누군가의 허세로 밀려날지도 모른다(그런 사람이 있는 모임이라면 그냥 빨리 손절하자).      


구울 시간에 밀린 대화를 하자! 꼬치의 장점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들은 식탁에서 소외 없는 대화를 만드는 데 도가 튼 이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발상은 현지에서 ‘뀀’이라 불리는 연변식 양꼬치를 보면 잘 드러난다. (먹어 본 이들이라면 다 알겠지만) 뀀은 적당한 크기로 썰어낸 꼬치를 거치대에 올리면 기계가 자동으로 익혀준다. 누군가가 굳이 뒤집어가며 구울 필요가 없다. 그만큼 구성원들은 서로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이따금 고기가 타지 않는지 봐주면 그만이다. 세심한 체크는 필요 없다. 양꼬치 표면에서 지방이 지글지글 끓어오를 정도로 구워졌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양꼬치의 또다른 장점은 시각적 자극이다. 양꼬치가 기름을 떨구며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역시 적지 않은 즐거움이다. 언젠가 한 번쯤은 길가에서 파는 전기통닭구이를 하염없이 지켜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심각하게 통닭을 살지 말지 고민해 본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양꼬치는 시각적 효과와 간편함을 모두 잡은 바비큐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가게가 어딘지는 비밀!


이는 고기가 익어가는 모습 그 자체가 일종의 판촉이자 볼거리임을 증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꼬치는 바비큐가 가진 사교적 기능과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한 요리라 할 수 있겠다. 요즘엔 산초와 두반장 양념을 묻혀 낸 마라양꼬치를 내놓는 가게들도 많다. 마라탕이나 훠궈를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이들에게는 훌륭한 절충안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양꼬치 집에서는 절대 양꼬치만 먹어서는 안 된다. 메뉴판에 적힌 저 수많은 메뉴들을 무시하고 그냥 갈 참인가! 양꼬치가 맛있는 가게들은 요리도 무조건 맛있다. 나는 지인들과 양꼬치를 먹으러 가면 가지볶음을 무조건 시킨다. 양꼬치보다 가지볶음을 먼저 시킬때도 있다. 경험상 이게 맛있으면 다른 메뉴들도 무조건 맛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지는 다루기 어려운 채소다. 열을 가하면 형태를 잃고 녹아버리기 때문에 바삭한 튀김옷을 유지하면서 가지를 튀겨내기란 매우 어렵다. 잘 튀겨내도 양념에 버무리는 과정에서 형태를 잃고 뭉그러지기 쉽다. 가지 안에서 나오는 수분 때문에 간을 잡는 것도 까다롭다.


이국의 요리이기 때문일까. 가지볶음을 잘하는 양꼬치 가게들은 보통 조선족 동포가 사장님인 경우가 많다. 양꼬치의 맛은 고기를 고르는 안목과 뀀 양념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현지 요리까지 통달하긴 어려워서가 아닐까.


장씨 아줌마에게서 들은 양꼬치의 역사


양꼬치의 정체를 처음 알게 된 건 같이 일하는 조선족 장 씨 아줌마로부터다. 선양 출신인 아줌마는 장사가 안 돼서 무료할 때면 나와 음식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나에게 깐두부와 훈둔, 요우티아오를 전파한 사람이기도 하다. 어느 날인가는 ‘양꼬치를 먹고 왔다고’ 자랑하니 장 씨 아줌마로부터 양꼬치의 역사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조선족들이 양꼬치 장사를 하려고 들어온 게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한국과 조선족 자치구를 오가면서 보따리장사를 하거나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려고 온 거였는데, 조선족 동포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교포를 상대로 하는 양꼬치집들이 하나 둘 생겼단다.


처음에는 조선족들도 양꼬치가 이렇게 잘 나갈 줄 몰랐다고 한다. 지금은 그들의 중요한 생계수단으로 자리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들과 재일교포 사회는 공통점이 있다. 이민자로서 혐오와 차별을 딛고 생존 수단으로 맛을 선택했다는 것 말이다.


요식업에서 일하는 이로써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그 자체로 존경스럽다(외국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동포들도 마찬가지다). 이질적인 사회에 연고 없이 뛰어들어 가스관과 수도관을 연결한 뒤, 고국의 음식을 만든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른 사회 안에서 구현해 낸다. 저마다의 밥벌이가 이끌어내는 추동력은 경이로울 정도다. 허나 그 추동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건 결국 맛 때문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맛은 최고의 설득 수단이다. 이방인으로서의 차별과 혐오를 이겨내는 그들만의 강력한 무기다.  


맛은 최고의 설득력이다


고작 음식 따위로 차별을 이겨낼 수 있겠냐고? 그때마다 항상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일본 야마구치 신센구미의 당수 야마모토 타로 의원의 가두연설이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한국과의 우호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해 온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없앨 수 없으니 결국 잘 지내야 한다. 없앨 수 없는 것들을 없애야 한다고 말해봐야 우리만 피곤하다. 그리고 그 없애고 싶은 나라와 6조 엔의 교역을 하고 있다. 그는 토론회나 가두 연설에서 줄곧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날도 그는 도쿄 시내에서 같은 내용으로 가두연설을 하고 있었다. 허나 평소와는 다르게 여기저기서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혐한을 외치는 극우 단체 회원들이 청중으로 합류한 것이었다. 야마모토 타로의 연설 마디마디마다 한국인은 다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혐오발언들이 곳곳에서 날아왔다. 그때 나온 야마모토 타로의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일갈.      


“그렇게 말하는 분들, 그토록 한국을 욕하지만 친구들 만나서 야키니쿠 먹잖아요. 분명 며칠 전에도 먹었겠죠. 아니에요?”      


그 순간만큼은 군중들이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예수님이 “죄 없는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같은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그 비판을 순순히 듣고 있던 혐한 시위대의 모습이 좀체 잊히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할 것이다. 무엇을 지지하든 모두가 맛있는 걸 좋아하니까. 사람은 싫어해도 맛있는 것까지 미워하기는 어려운 법.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신념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혐한 집회에서 혐오 발언들을 쏟아내고 돌아가는 길에 야키니쿠를 먹었을 그들처럼.


뭘 믿고, 뭘 지지하든...이 맛있는 걸 안 먹으면 당신만 손해


야마모토 타로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할 순 있어도 그 존재까지 부정할 순 없다는 걸. 좋든 싫든 우리는 타인과 얽혀 있다. 현대 사회에서 그 고리를 완전히 끊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그리고 정의롭지도 않다). 이민자들이 선보이는 맛은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일깨운다. 양꼬치가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인 음식이 된 것처럼.


맛있는 것에는 국적이 없다. 다양한 맛을 접할수록 세상은 그만큼 더 풍요로워진다. 독서와 여행이 그렇듯, 맛 역시 인간의 지평을 넓혀주는 중요한 도구다. 다양한 맛을 경험할수록 우리는 국적에 상관없이 같은 인간임을, 동시에 그 인간들이 저마다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짐작 가는 반응들이 있다. 아마 반응들의 대부분은 야마모토 타로 앞에서 대놓고 “한국인은 다 죽여 마땅하다”라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혐오발언들일 것이고. 한 번이라도 양꼬치를 먹어 본 적이 없는 자만 나에게 돌을 던지시라. 그리고 돌을 던진 뒤 한 점이라도 먹어보길 바란다. 이왕이면 하얼빈 맥주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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