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덕후다. 어느 정도냐면, 실제로 도쿄 여행 당시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이하 고로상, 마츠시게 유카타 분)가 드라마에서 들렀던 가게들 몇몇을 실제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치즈가 잔뜩 들어간 쿨차(인도식 피자)를 팔았던 인도요리 전문점 '카말풀'. 회와 자바리 조림 정식이 맛있었던 '쿠에'. 일식 이자카야와 아프가니스탄 요리를 퓨전으로 내놓는 '파오' 등이다.
그중 '파오'에서는 고로상이 앉았던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가 보니 어떻냐고? 드라마를 위한 별도의 섭외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 가게를 들러본 결과 모두 기대 이상의 맛이었다. 특히나 '파오' 맛과 분위기는 갈 때마다 감동적이어서 도쿄를 여행할 때면 어김없이 들르곤 한다.
이런 경험 덕에 나는 고독한 미식가에 나온 가게들은 일단 실패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일단 작가 본인이 미식가니까. 해서 일본에 여행을 가기 전에는 무조건 근처에 고독한 미식가에 나왔던 가게가 있는지 살펴본다. 아쉬운 건 오래된 골목의 허름한 식당들의 정취를 즐기는 드라마 콘셉트 탓에 도심의 식당들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그 탓에 식당을 찾아가려면 애써 짜 놓은 여행 동선이 망가지곤 했다. 도요스 시장과 오다이바를 가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식당 하나 때문에 (지하철로 한 시간 반 걸리는)치바를 갈 수는 없는 노릇. 일본을 들른 횟수에 비해 <고독한 미식가> 속 식당에 방문한 적이 많지 않았던 건 그래서다.
연기가 자욱한 식당을 좋아하는 이상한 취향
결국 수 년째 버킷리스트로만 남아 있는 식당들이 쌓여만 간다. 사이타마 현에 있는 벽돌만 한 목살 돈가스를 파는 가게 '키세키 식당'과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발도 들이지 못한다는 사천요리 전문점 '진진', 소와 돼지의 특수부위를 파는 야키니쿠 전문점 '야마겐'이 그렇다.
사실 모든 에피소드를 통틀어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야마겐'이다. 굉장히 큰 양대창 구이를 파는 곳인데, 드라마 전편을 다 봤지만 야마겐이 나오는 에피소드를 제일 재밌게 봤었다. 이 호르몬 야끼(일본식 곱창 구이) 가게는 환풍기를 다 갖췄음에도 늘 연기가 자욱하게 껴 있는 걸로 악명 높다.
실제로 드라마에서도 연기와 관련된 장면이 나온다. 옆 테이블 손님이 대창을 너무 많이 올려 굽는 바람에 가게 안에 연기가 자욱해지는데, 결국 고로상은 식사를 포기하고 잠시 바깥으로 대피한다(흡연 말고 다른 이유로 식사 도중에 자리를 뜨는 건 이 에피소드가 유일할 것이다).
환풍기가 부실한 걸까? 사장은 그렇지 않다며 화장지가 흡기구에 찰싹 달라붙는 모습을 손님들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가게가 대체 너구리굴이 되는 이유는 뭘까? 나도 잘 모르겠다. 환기구가 천장에 가깝게 붙어 있는 구조 때문이 아닐까 의심만 할 뿐(그렇다면 같은 구조로 지어진 다른 가게들은 왜 멀쩡할까?). 흡기구를 파이프처럼 늘어뜨리는 한국의 흡기 설비는 일본에서 소방법 위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 한국의 고깃집은 쾌적하게 변모한 지 오래다. 한국의 환기 기술을 저 가게에 소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연기 자욱한 고깃집을 본 게 언제더라 생각해 보면, 저것도 나름 운치가 있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아재 감성이라면 죄송합니다). 정신세계가 이상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적당하게 연기가 찬 가게 안은 안개가 낀 새벽녘이 떠오른다.
뭔가 몽환적이랄까. 안줏거리들이 구워지며 연기가 슬슬 피어오를 때, 나는 그제야 비로소 상대방과 잔을 주고받으며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느낀다. 술을 즐겨 마시지는 않지만, 그게 내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누리고 싶은 낭만이다. 오히려 주당이 아니니 그런 분위기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여행 버킷리스트에서 이 가게를 지울 때 내 심정은 오죽했을까.
어쩌다 찾아간 부산의 연탄 곱창집
탄내를 각오하고 먹는 연탄구이. 3일 내내 냄새가 빠지지 않아서 고생 좀 했다. 하지만 재방문 의사 100%
하지만 인생은 알다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을 포기하게 됐을 때, 어느 날 그것이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때가 이따금 생긴다. 적어도 비슷한 거라도 누려볼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온다. 나는 작년 무렵에 떠난 부산 여행에서 이걸 경험했다. 계획 없이 부산시청 근처를 돌아다니다 양곱창 가게 앞을 지나던 때였다. 매장 안이 가득 차 있었고, 살짝 열린 문 밖으로 연기가 구름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검색해 보니 양념에 재운 내장을 연탄으로 구워주는 곳이었다. 연탄구이이라니, 그럼 들어가야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가게 구조가 특이했다. 매장 안에 여러 구이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샵인 샵(Shop in Shop)의 1980년대 버전 같았다. 매장 안에 영업장과 사장님이 여럿인 아득하고 난해한 구조였다. 안내만 전문으로 하는 여사님(그럼 이 분은 어느 가게 소속이란 말인가!)이 자리가 비어있는 곳으로 안내해 줬다.
가자마자 고를 것도 없이 소금 양념이 된 모둠구이 하나를 시켰다. 주문하자마자 총알처럼 토막 난 내장 모둠이 나왔다. 사장님이 간과 양 대창을 순서대로 연탄불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연탄의 강한 화력 탓인지 내장의 지방이 석쇠에 닿자마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연탄
연탄은 장단점이 명확한 소재다. 가격은 참숯의 반값에 불과하지만 뿜어내는 화력은 비슷하다. 단시간에 고기의 안쪽과 바깥쪽을 골고루 구워낼 수 있다. 육즙이 연탄에 닿았을 때 연소 가스가 고기에 스미는 효과도 같다.
차이가 있다면 향이다. 참숯에서는 은은한 불향이 나지만, 연탄은 진짜로 고기를 태운 듯한 향이 난다. 그래서 참숯에서 고기를 굽는 것처럼 진득이 올려놓고 뒤집기만 해서는 안 된다. 넉넉하게 고기를 올린 뒤 집게를 이용해 굴리듯이 구워야 타지 않고 적당한 굽기의 고기를 즐길 수 있다. 다행히 이 가게의 사장님은 그걸 기가 막히게 해냈다.
그럼에도 연탄구이는 강렬한 탄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이렇게 명확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연탄을 선호하는 건, 연탄의 불 향이 고기나 내장의 누린내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고기의 잡내를 맡느니 연탄 냄새를 맡겠다는 게 나은 이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인 셈. 우리 둘의 취향도 그렇다.
원래 내장을 안 먹는 아내가 용기를 내 곱창을 집어 먹은 이유다. 그리고 이내 "맛있네?"라는 소리가 나왔다. 내장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표현이 나온다? 더 말해 무엇할까. 양은 꼬독꼬독하니 씹을수록 고소했고, 곱창과 대창은 지방의 감칠맛과 불 향이 적절히 배어 나왔다. 장사가 잘 되는 집이라 그런지 씹을수록 신선한 내장의 향이 느껴졌다.
매장은 시끌시끌, 연기는 가득...그곳에서만 할 수 있는 얘기들
문제는 옷에서 연탄 냄새가 안 빠진다는 것과 일산화탄소 중독을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연기였다. 매워서 눈을 뜨기 힘들 즈음이 되어서야 손님을 안내하는 여사님이 문을 열고 환기를 시작했다. 그래도 여기가 드라마 속 야마겐 보다는 나아 보였다. 고로상은 견디다 못해 가게를 뛰쳐나왔으니까. 그리고 가게 안이 쾌적하다면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도 얘기했듯 나는 적당하게 연기가 낀 가게의 모습을 좋아하니까. 화이트노이즈처럼 손님들이 적당한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배경처럼 깔리면 더 좋다.
내가 하는 말이 다른 테이블에는 들리지 않고,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들리면서도 너무 적막하지 않은 분위기를 이상적인 술집의 분위기라 생각한다. 야마겐은 아니었으나 내가 들른 이 가게의 정취는 그 모든 것을 얼추 갖고 있었다. 바로 옆에 취하지 않은 점잖은 손님들이 자리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일 년 간 입에도 안 대던 소주를 거기서 마시게 됐다. 아내와 소주잔을 기울인 건 8년의 연애 기간 동안 손에 꼽는다. 같이 살면서도 그간 꺼내지 않던 걱정들도 모두 그 자리에서 얘기했다.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지. 이다음 내가 계획한 미래와 일, 그리고 수입에 대한 공백은 어떻게 대비할지. 의식하지 못한 내 무능력함이 아내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닌지.
불판 앞에서는 그 어떤 밀폐된 공간보다도 사적인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운 손님들의 떠들썩한 대화와 매캐한 연기 속에 숨어 있을 때 말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왠지 모를 후련함을 느낀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