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때로 획일화를 낳는다. 적절한 규제를 지지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이를테면 특정한 건축재와 디자인만 허용해 도시의 미관을 해치지 않게 만드는 외국의 마을들처럼. 한국도 비슷하다. 서울시가 직접 나서 인사동 내에서는 한글 간판을 사용하도록 독려하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런 규제는 어떤가. 예를 들어 내가 폴리네시안 원주민의 음식을 파는 가게를 차렸는데, 이게 한국에 단 하나뿐이라면? 이 가게가 오래도록 영업을 할 수 있게 일정한 혜택을 주는 거다. 무슨 혜택? 나는 행정과 법률에 관해선 아는 게 많지 않으므로 거기까지는 얘기하지 않겠다(사실 행정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식자재를 들여올 때 떼이는 부가세를 줄여준다든가. 이를 테면 그렇다는 거다.
본디 음식문화란 교류하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한층 고양된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뉴욕과 런던에서 보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가게들이 몇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녹사평역 근처의 에티오피아 식당. 에티오피아에 매콤한 음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언젠가는 가야지 가야지 했는데, 결국 그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와 버렸다.
가지 마 저크치킨ㅜㅜㅜ
도시의 다양성을 창조하는 사람들
이는 단순히 가게 하나가 문을 닫았음을 뜻하진 않는다. 용산구에 자리를 잡은 해당 국가의 대사관 직원들은 근처에서 고향 음식을 파는 유일한 가게를 잃었다. 이태원에 놀러 온 이들은 좀 더 다양한 문화를 즐길 기회가 사라졌다. 이제 우리가 이 나라의 식문화를 간접 체험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비용을 치러야 한다(어쩌면 비용을 치러도 경험할 수 없을지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찾아가는 저크치킨 전문점은 정말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나는 그 가게의 사장님과는 일면식도 없다. 아마 그분은 내가 조용조용 찾아간 탓에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자메이카 콘셉트의 음식점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안주로 시킨 저크치킨이 맛있어 자주 들르게 됐다.
참, 저크치킨은 자메이카에서 먹는 그릴 치킨이다. 각종 향신료를 갈아낸 소스를 닭에 바른 뒤 숯불에 굽는다. 가족들이 다 모일 때면 늘 만들어 먹는 가정식이란다. 한국으로 치면 가족들끼리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과 비슷하달까. 한국어 자료가 많지 않아 번역기를 돌려가며 영문 검색을 해 보니 저크치킨 양념의 핵심은 후추란다.
참고로 자메이카는 중남미의 후추 주요 생산국 중 하나다. 해서 후추를 이용한 음식이 많은 건 당연한 인과. 실제로 다 익은 저크치킨은 색이 까맣다. 당황하지 마시길. 그렇게 처음 먹은 저크치킨의 맛은, 매웠다. 고추가 아닌 후추의 매운맛이었다. 만둣국에 후춧가루를 너무 쳤을 때 느껴지는 화한 기운이 사정없이 올라왔다.
후추향 가득한 저크치킨의 맛
그리고 뒤늦게 혀를 때리는 마늘과 고추의 향. 여기에 고기에 밴 강렬한 숯 향이 코를 타고 올라왔다. 향신료로 버무린 낯선 나라의 그릴 치킨. 바비큐 덕후인 나로서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내 표정을 보더니 씩 웃었다. "오빠, 신났구나? 그런 표정 오랜만이네." 급하게 스스로를 돌이켜봤다. 그 정도였나? 음, 돌이켜보면 그 정도였던 것 같다. 평소에 술도 잘 안 마시는데 쿠바 리브레(콜라와 럼주가 섞인 칵테일)까지 주문한 걸 보면.
그도 그럴 게 이 가게는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레게 감성으로 가득하다. 바비큐, 듣고 싶은 노래,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친구, 달달한 칵테일 한 잔. 내가 좋아하는 게 이 가게에 다 있었다. 결국 나는 이 가게를 좋아하게 됐다. 좋아한 만큼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때때로 찾아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렐 만큼 좋아했다.
그러던 중 집 근처 야당동에 2호점이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연착의 아이콘 경의선을 장장 30분이나 탄 뒤 디지털미디어시티 역에서 내려 6호선으로 환승해 합정역에서 내리는 일은 제 아무리 단련된 경기도민이라 할지라도 힘에 부친다. 그러던 차에 근처 야당동에 2호점을 냈다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게는 아직 개발이 안 된 농수로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둡고 답답한 느낌의 1호 점보다 훨씬 밝고 쾌적했다. 무엇보다 1호점에서 먹던 저크치킨의 맛 그대로였다. 흘러나오는 레게 음악 중간중간에 "배달의 민족, 주문!"이라는 소리에 가끔 PTSD가 도지기도 했지만.
신혼 생활 1년 동안 거기서 꽤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아내와 싸운 뒤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찾아가기도 했고, 아내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찾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올 때면 풀벌레의 울음소리와 멀리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레게 음악이 듣기 좋았다. 손을 잡고 그 좁다란 농수로를 걸으면서 꽤 많은 얘기들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갑자기 가게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SNS에 올라왔다. 아니, 개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문을 닫지? 장사도 그럭저럭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 농수로를 도로로 바꾸는 공사를 하면서 가게가 없어진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곳에 트럭들이 수시로 오가면서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없는 환경이 됐단다.
능력이 아닌 환경으로 문을 닫는 가게는 없었으면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뒤, SNS에 애지중지 키운 화초들과 인테리어 장식품을 차에 싣고 파주를 떠나는 사장님의 사진이 올라왔다. 어이가 없었다. 그 인적 드문 농수로에 누가 다닌다고 아스팔트 도로를 깐단 말인가. 도로 옆에 있는 갈빗집은? 주점들은?
이제 고양시와 파주시에 사는 사람들이 자메이카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장장 한 시간을 걸려 서울특별시 마포구로 내려와야만 한다. 경기도민이 케밥을 먹으려면 지하철을 타고 용산까지 와야만 하는 것처럼. 그래서 말인데 지금 합정에 있는 1호점은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다. 남은 가게까지 없어진다면 한국 어디에서도 저크치킨을 먹을 데가 없어지니까.
도시를 다채롭게 만드는 건 번듯한 고층건물과 아파트가 아니다. 여러 제약조건을 이겨내며 새로운 시도를 해내는 이들의 노동이다. 성패는 하늘의 뜻이고, 투자는 개인의 책임이다. 그러나 다양한 시도를 하는 가게들이 행정과 환경 탓으로 문을 닫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이들 앞에 늘 행운만이 가득하길. 전 세계의 다양한 바비큐를 한국에서 다 먹어보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