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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Sep 26. 2024

비록 화덕의 민족은 아니지만

인류학자들은 예로부터 대륙을 여러 문명권으로 나누어 정의했다. 새뮤얼 헌팅턴은 서구를 기독교 문명권, 중동을 이슬람문명권으로 규정했다. 언어학자들은 한자문화권과 영어문화권으로 동서양을 구분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역사가 해양문화권과 육지문명을 축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화덕 문명과 아궁이 문명은 어떤가. 화덕으로 빵을 구워먹는 사람들과 아궁이로 쌀을 끓여 먹는 이들의 교류로 문명이 발전했다는 가설 말이다.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빵을 찾는가. 이미 그것만으로도 이 가설의 절반은 입증 가능하지 않나.  


처음 먹어 본 난의 맛


도쿄도 키바 구의 카레 전문점에서 먹은 치즈 쿨차 세트. 잘 구워진 치즈 쿨차의 맛은 충격적이다.

   

매일 쌀밥을 먹는 문명권에서 태어난 나는 화덕 문명권의 삶이 이따금 부럽다. 처음에 인도음식을 접할 때가 그랬다. 스무 살 무렵 집 근처 시내에 커다란 인도식당이 문을 열었었다. 급식 카레 말고 정통 인도 카레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함을 처음 알았을 무렵이었다(한식만을 고수하던 부모님의 취향을 생각하면,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때 식구들과 ‘난’이라는 걸 처음 시켰다. 납작하게 편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서 구워낸 빵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으나, 그게 어떤 형태의 것인지는 아무도 가늠하지 못했다. 심지어 '플래인', '갈릭', '버터' 같이 종류도 여럿이었다. 우리는 그때 꿀과 버터를 시켰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처음 접한 난의 맛은 감동적이었다. 잘 구워진 반죽은 쫄깃했고 불에 살짝 그슬린 부분은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가격이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으나 엄마는 '이런 걸 먹으려고 그동안 열심히 일했나 보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중요한 가족 행사가 있는 날이면 줄곧 집 근처의 인도 식당을 찾곤 했다(물론 엄마의 1순위는 늘 갈빗집이었지만). 그만큼 불에 구운 밀가루의 매력이란 한평생 한식에 길들여진 중년의 여사님에게도 통할 만큼 직관적인 것이었다.  물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재현할 수 없는 화덕의 맛


허나 난이 주는 충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차 충격은 몇 년 전 도쿄 키바역 근처의 인도 식당에서 먹은 치즈 쿨차로부터 시작됐다. 쿨차는 남인도에서 먹는 화덕 요리로 얇게 편 난의 반죽 안에 꿀과 치즈를 가득 넣고 구워낸 요리다. 마치 원시의 피자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만큼 맛도 원초적이다. 먹는 순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성경의 구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 이탈리아의 마르게리타 피자, 터키의 피데와 인도의 쿨차는 어떤 연관성을 가졌는가. 수 천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음에도 모두 한결 같이 화덕을 자신들의 주방에 들이게 된 역사적-환경적 필요성은 무엇이었을까. 세 나라 모두 구운 빵에 치즈를 올려 먹을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그것은 문명간 교류의 결과일까 '이렇게 하면 더 맛있다'는 직관의 결과일까.


한국에 돌아와 마트에서 커리와 난 믹스를 발견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집어든 건 그런 의미에서 문명적 도전이었다. 밥솥 문명의 자손이 화덕 요리를 만드는 역사적 순간. 포장지에 적힌 대로 밀가루 250그램에 물 200밀리리터를 넣고 반죽했다. 둥글게 뭉친 반죽은 상온에서 두 시간가량 발효시켰다. 그 후 밀가루를 살짝 발라서 밀대로 얇게 밀어 프라이팬 구웠다. 인도식당에서 하던 것처럼 노릇노릇함을 넘어 약간 거뭇거뭇해질 때까지 구웠다.      


그렇게 만든 난의 맛은, 실망스러웠다. 겉이 살짝 탈 정도로 익었음에도 안은 설익어 푸석푸석했다. 화덕만이 가진 숯의 향은 당연히 없었다. 설익은 밀가루와 다 녹지 않은 피자 치즈가 꿀과 만나니 조청에 찍은 껌을 밀가루 반죽과 함께 씹는 기분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숯불이 만들어낸 열기와 가스레인지는 애초에 비할 바가 못 됨을. 


동양도 서양도, 불에 구운 탄수화물은 맛있다


우리가 현지에서 현지의 치아바타와 마르게리타 피자, 피데를 먹을 때 감탄하는 건 그것이 장작 화덕에서 구워져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궁이 문명의 주방에서는 흉내내기 어려운 맛이다. 그렇게 화덕문명을 향한 갈증은 가스레인지와 프라이팬 앞에서 한 번 더 가로막혔다.


우리는 결국 그 헛헛함을 가래떡을 구워 먹으며 달랬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궁이 문명의 자손으로서 우리가 구원받을 길은 어디 있는가. 그때 '난 대신 떡'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쌀을 구워 먹을 수는 없지만 떡을 구울 수는 있다. 피데는 없지만 숭늉과 누룽지가 있다. 불에 구워 먹는 일본식 주먹밥 야끼메시와 떡 구이 당고는 어떤가.


비록 우리는 밥솥으로 쌀을 끓여먹는 문명권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탄수화물은 불에 구워야 맛이다. 아, 이는 동서 고금의 진리였구나. 잊지 말아야겠다. 문명은 달라도 우린 같은 인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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