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맛은 숯불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다. 중식 역시 불맛을 즐길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다. 고깃집 불맛이 숯불과 그 연기에서 온다면, 중식의 불맛은 강렬한 불과 기름에서 온다. 불길과 웍의 기름이 만나면 불이 붙는데 여기에 재료가 직접 닿으면 강력한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난다. 마이야르 반응이란 아미노산과 당이 가열돼 갈색으로 변하면서 다채로운 풍미를 내는 것을 말한다.
불맛 중독자로서 단골 중식당의 기준은 명확하고 간단하다. ‘요리에서 불맛이 나는가’다. 음식에서 불맛을 내는 중식당이 생각만큼 흔치 않아서다. 사실 불맛을 좋아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중식당만 고집한 건 아니다.
경험상 불맛을 내는 가게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요리를 데워 내는 대신 매번 주문 즉시 새로 요리를 하는 곳이 많았고, 다른 메뉴의 수준도 괜찮았기에 단골이 된 것일 뿐이다. 더불어 비슷한 맛의 동네 중식당들이 많은 탓에 불맛을 앞세운 중식당은 언제나 독보적인 존재감이 느껴지곤 했다(적어도 동네 상권에서는 말이다).
더불어 이런 가게들은 유독 존경스러운 면이 있다. 본래 중식당의 주방일은 공사현장만큼이나 고되다. 그도 그럴 게 웍이 보통 무거운 게 아니다. 웍을 오래 다룰수록 손목과 팔꿈치에는 자연히 무리가 간다. 이게 다가 아니다.
주방 안에는 방울을 터트리며 터지는 기름과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화구 여러 개가 늘 지뢰밭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 환경에서 매일 수백 접시의 요리를 뽑아내야 하는 게 중식당의 노동이다. 중화요리 주방장들의 직업 수명이 유독 짧은 이유기도 하다.
내가 하는 일이 논산훈련소 5주 차 기초 군사훈련이라면, 중식당의 일은 해병대 지옥주 훈련이랄까. 미리 만들어 놓은 짜장 소스와 짬뽕 국물은 그 고된 노동을 줄이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어이 매번 새로 조리한 소스와 국물을 손님에게 제공하길 마다하지 않는 가게들도 세상에는 분명 존재한다.
이미 고생스럽지만 그럼에도 한 발 더 뛰는 근성은 나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기에 늘 존경스럽다. 그런 가게는 찾아내는 순간 이 가게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는 결의를 다진다.
우연히 만난 불맛의 중국집!
상하이문의 간짜장. 요즘도 그립다.
과거의 여자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아내가 응암동 주민이던 시절 단골 중식당이 그랬다. 자취방으로 살림살이를 다 옮긴 후 동네를 둘러보던 때였다. 동네에 어떤 음식점들이 있는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입구가 새빨간 중국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의 중식당들은 길게 늘어선 배달 오토바이의 대수로 맛집임을 과시하는데, 이 가게는 배달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가게 입구에서 짜장 볶는 냄새로 존재를 알릴 뿐.
나는 그 냄새만으로도 이 집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설사 불맛을 구사하지 않는 곳일지언정 이 가게는 맛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드는 느낌 있잖은가.
고맙게도 이 가게는 요리 전체가 불맛을 앞세운 가게였다. 나와 아내가 이곳에서 시킨 첫 메뉴는 고추짜장과 짬뽕, 그리고 게살볶음밥이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고추짜장. 매운 사천고추를 춘장과 양파, 큼직한 돼지고기와 함께 볶아냈다. 짜장에서 강렬한 불의 향과 사천 고추의 향이 동시에 올라왔다.
냄새만 맡았는데 이미 먹은 것만 같은 느낌. 예상은 다르지 않았다. 아는 맛은 그래서 무섭다. 아니, 그 아는 맛보다 더 강렬한 맛이었다. 한입 먹자마자에서 입 속에서 불이 나는 느낌과 불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연신 물을 들이켜면서도 젓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그다음 나온 짬뽕. 강력한 화력으로 볶은 탓에 배추가 군데군데 검게 그을려 있었다. 여기에 대비되는 주황색의 선명한 국물과 새하얀 홍합 살이 그릇을 가득 채웠다. 맛을 봤다. 잘 익은 양파는 달달하면서도 너무 익혀 흐물흐물하지 않았다. 국물을 한 술 뜨는 순간 배추의 은은한 불맛과 싱싱한 홍합의 시원함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이렇게 큰 오징어라니!
이 중국집, 볶음밥도 잘하네?
같이 시킨 볶음밥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요즘 중국 음식을 사 먹는 이들에게 늘 듣곤 하는 불만사항 중 하나가 볶음밥 아니던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밥에 빈약한 계란,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은 지 오래돼 질퍽하고 맛없는 짜장. 언제부터인가 이런 볶음밥을 내놓는 중식당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들이 들리곤 한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훌륭한 볶음밥을 구사하는 중식당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 가게도 그중 하나였다. 기름의 양은 밥의 찰기를 죽일 만큼만 사용했으며 밥알은 뭉개지지도 뭉쳐지지도 않은 채 잘 볶아졌다. 소금 간도 적절하고 게살도 향을 간직한 채 부드러웠다. 결정적으로 밥알에서 기분 좋은 불맛이 났다. 한마디로 거를 타선이 없었다.
바로 지도 앱에 가게 이름을 검색해 봤다. 역시 이 동네에서 꽤나 알려진 가게였다. (사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방송국 저녁정보 프로그램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왔지만 동네 주민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한사코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소문처럼 따라오는 곳이었다.
처음 발견한 중국집이 이 정도 수준이라니. 다른 곳은 얼마나 맛있을까? 시간이 흘러 우리는 응암동이 은평구 맛집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새 집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이 동네에서 세 곳의 중화요리 맛집을 찾아냈다. 안타깝게도 이사 간 곳에서는 끝내 그만한 수준의 중식당을 찾아내지 못했다. 응암동 주민들은 알고 있을까? 맛있는 중식당이 집 근처에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다양한 주장들이 음식문화를 꽃피운다
이렇게 얘기하면 한편으로는 ‘꼭 불맛이 나야 중화요리 맛집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맞다. 그리고 잘 안다. 불맛이 밴 중화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셰프들과 고객들도 있다는 걸. 그들의 중화요리 지론은 대략 이렇다. 신선한 기름과 강렬한 불은 재료의 맛을 살리는 데 써야 의미가 있다는 것.
지나치게 불맛을 강조하면 재료가 지닌 맛을 반감시키며, 모든 메뉴의 맛을 획일화시킬 수 있다. 광둥요리는 좋은 예시다. 광둥지방은 기름을 적게 쓰면서도 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리길 좋아한다. 그 또한 엄연히 중식의 일부다. 그저 나는 불맛의 중화요리가 좋을 뿐.
이렇게 하면 더 맛있다 를, 존중하는 편이다. 그 시각과 취향은 이 지구의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다양한 고집과 취향들이 만나 다양한 음식문화를 만든다. 존 스튜어트 밀이 주창했던 사상의 자유 시장은 요식업계에서 온전히 살아 숨쉰다.
단언컨대 그 어느 산업에서도 이토록 완전한 사상의 자유시장을 본 적 없다. 앞으로도, 그 앞으로도 각자가 믿고 따르는 취향과 철학이 뒤엉켜 더 맛있는 요리들이 태어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요리사들의 손'에 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