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불에 구우면 맛있다. 디저트도 다르지 않다. 설탕이 불에 닿았을 때의 향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잘 와닿지 않는다면 초등학교 시절 뽑기를 떠올려보자. 뽑기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데 교문 근처에 반 친구들이 웅성웅성 몰려 있었다.
한참 산만할 나이의 초등학생들이 고도로 집중하는 이벤트는 당시 두 가지였다. 병아리 팔러 온 아줌마와 만화 <달려라 부메랑>에 나온 미니카 트랙. 그 이상의 주목을 끄는 이벤트가 출현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었다.
다이어트 중인데 참지 못하고 사버렸다. 맛은 어릴 때 그대로다!
날카로운 첫 뽑기의 맛
친구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어떤 아저씨가 이상한 국자에 설탕을 넣고 휘휘 젓고 있었다. 설탕이 타기 직전에 정체 모를 하얀 가루를 넣었다. 캐러멜 색이 된 설탕이 이내 빵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부풀어 오른 설탕을 철판에 쳐 떨어뜨렸다. 그리고 하트 모양의 틀을 대고 호떡을 지지는 뒤지개로 꾹 눌렀다. 몇 초가 지나니 뽑기는 하트 모양의 전병처럼 변해 있었다.
바로 옆에 친구가 돈 500원을 내고 막 만든 뽑기를 받아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보니 뽑기를 산 친구들이 단체로 전신주 옆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모두가 뽑기를 공짜로 하나 더 먹기 위해 침을 발라가며 열심히 모양을 도려냈다.
사실 나는 모양을 어떻게 잘 도려내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 목표는 "에이!" 소리가 나는 친구 옆에 붙는 거였다. 도려내기에 실패한 옆에서 기웃댈수록 '너 이거 먹을래?' 소리를 한 번쯤은 듣기 마련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조각들을 받아먹었다.
처음 먹은 뽑기의 맛은 날카로웠다. 이가 썩을 정도로 단맛 뒤에 서서히 밀려오는 쓴맛. 나는 식사 후에 믹스커피를 꼭 마셔야만 하는 중년의 여사님들처럼 뽑기 맛에 중독됐다. 불에 닿은 설탕이 위력적이라는 걸 알게 된 나의 첫 군것질거리였다.
나이를 먹고 여러 가지 음식들을 먹어보면서 뽑기처럼 설탕을 불에 그슬린 디저트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역시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다른 제과류처럼 설탕을 반죽에 섞어서 굽는 것보다 표면에 설탕을 뿌린 뒤 가열하는 것이 좀 더 풍성한 단맛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당분의 캐러멜화 때문이다.
타이밍이 생명인 캐러멜화
캐러멜화는 설탕을 녹이는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 화학작용이다. 설탕이 가열되면 열분해 반응이 일어나며 완전히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낸다. 대략의 과정은 이렇다. 설탕의 온도가 올라가면 분자가 서로 부딪치기 시작한다. 움직임이 격렬해지면서 산산조각 난 설탕 분자가 수천 개의 새로운 향 분자로 거듭난다. 뽑기에서 나는 달달하면서도 씁쓸한 향은 이 원리 때문이다.
캐러멜화는 크게 건식과 습식으로 나뉜다. 습식은 물을 넣고 끓인 뒤 졸이는 것을 말하고, 건식은 직접 열을 가하는 방식을 말한다. 프라이팬에 설탕을 넣고 열을 가하거나 직접 토치로 그슬리기도 한다(이 분류에 따르면 뽑기는 건식이다).
건식이든 습식이든 제대로 된 캐러멜을 만들려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가열한 설탕은 시간이 지날수록 황색에서 갈색으로 변하는데 점점 색이 어두워질수록 당 입자가 분해되면서 단맛이 희미해진다. 여기서 더 가열하면 숯처럼 타버린다. 캐러멜은 짙은 호박(송진이 굳어서 화석화된 보석의 일종) 색일 때 가장 달고 향이 좋다.
특히 건식으로 캐러멜을 만들 경우 온도가 매우 빠른 속도로 오르므로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마시멜로를 불에 구워 봤다면 잘 알 것이다. 잘 구워진 마시멜로는 표면은 캐러멜화되고 안쪽은 말랑해진다. 한입 베어 물면 마치 구름을 씹는 듯 부드럽고 달달하다.
안타깝게도 가열 중에는 이 상태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을 잘 포착해야 한다. 너무 조급하면 그냥 먹는 것과 다르지 않고, 너무 구우면 겉에서 쓴맛이 나며 끝내 물처럼 녹아 꼬챙이에서 떨어진다. 그간 굽다가 타이밍을 놓쳐 태워 떨군 마시멜로가 몇 개던가.
만리재 르 셰프 블루에서 먹은 크림브릴레!
고구마, 건식 캐러멜 디저트의 왕
이런 절망에서 구원자가 되어주는 건식 캐러멜 디저트는 군고구마다. 예열한 오븐에서 200도 오븐에서 한 시간가량 뒤집어 구워주면 된다. 망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물론 그 중 최고는 길거리에서 아저씨가 드럼통에 나무를 때워 익힌 군고구마다.
종이봉지에 담긴 고구마를 안고 집으로 뛰어와 장판 위에 앉아 고구마를 반으로 가르는 순간 바로 느낄 수 있다. 군고구마야말로 인간이 발견해 낸 가장 완벽한 캐러멜 디저트임을.
불에 은근하게 구워 녹아내린 영롱한 당분, 나무 향의 조화는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하다. 여유롭고 등 따습고 달다구리 한 군고구마가 내 앞에 있다. 그렇다. 인생에 다른 게 필요한가.응? 그전에 호박고구마인지 밤고구마인지 정체를 밝히라고? 이 사람들이! 당연히 호박고구마지 뭔 소리세요! 호박고구마 만세!(후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