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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urmond Jun 14. 2021

제목, 뺄 말을 빼고 남은 단 한 줄

2021년 6월 2일 수요일 편집자의 일기

사회부 동기는 입사 후 줄곧 본인이 성매매, 성착취 관련된 무언가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게 정말 장담하는 것이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든 왠지 그는 무언가 일을 해낼 거라 생각했다. 오늘 1면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를 없앤 거다. 그는 ‘수원역 성매매 단속이 느슨하다’는 내용의 보도를 시작으로 넉 달 동안 수십 개의 기사를 단독으로 쏟아냈다. 결국 포주들로부터 ‘업소 모두 5월 자진 폐쇄’라는 믿기지 않는 약속을 받아냈다. 내심 5월 마지막 날을 기다렸다. 정말 모두 사라질까. 113개 있었던 업소 중 5월 말까지 버티던 곳은 10곳 남짓. 31일 자정 무렵이 되자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짐을 싸 떠났다. 6월 첫째 날 동기가 가져온 5월 마지막 날 수원역 풍경이 담긴 기사를 읽고 믿기지 않아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오늘 1면은 전국에 나갈 일간지 1면 중에 가장 기념될 1면이 될 거라고, 사회부장이 퇴근길에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나도 그만큼 부담이 됐다. 그 부담감에 무게를 더한 두 가지 단어가 있다.  


동기는 내게 기사를 미리 넘기면서 되도록 ‘집창촌’이란 말을 제목에 넣지 말 것을 당부했다. 나도 그의 기사를 다룰 때 항상 그 단어가 거슬렸다. 사전에 등재된 말이고 오랫동안 통용됐다 해서 문제의식 없이 사용해도 될까. 집창촌 대신 성매매 집결지를 쓰고 싶었지만 글자 수가 한정돼 있는 제목에서 2배나 음절이 긴 용어를 사수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홀로 타협을 하며 집창촌을 제목에 몇 번 올렸다. 동기는 그때마다 시민단체의 연락을 받아왔다고 한다. 오늘 제목에선 (이미 정해져 바꾸기 어려운 컷 제목을 빼고) 그 단어를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게 내 부담감을 더한 한 개 단어다.


1차로 데스크에 올린 제목은 [적막뿐인 홍등가... 성착취 역사 ‘종지부’]였다. 보통 ‘적막뿐이다’ ‘어둠이 깔렸다’는 건 부정적인 상황이지만 이날만큼 적막과 어둠이 긍정적인 순간이 또 있을까. 개인적인 욕심에 ‘적막’을 꼭 넣고 싶었다. 뒷부분 ‘성착취 역사 종지부’는 기사 본문에 나온 말이었다. 이게 사회부장과 토론을 붙게 만든 빌미가 됐다.


편집부장을 거쳐 수정된 제목은 [성착취 역사 ‘종지부’… 홍등 끄고, 새 빛 밝힌다]. 오늘 보도는 단지 성매매 집결지의 마지막 날 현장을 다룬 르포기사가 아니라, 이제 남겨진 그 홍등가의 재생과 ‘직장’을 잃은 종사자들의 자활이란 숙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다뤘다. 수정된 제목 뒷부분 ‘홍등 끄고, 새 빛 밝힌다’는 그래서 기사 전체를 아우르는,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었다.


수정된 제목을 만족하고 있던 순간, 사회부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특유의 자상하면서 차갑고 장난기 어린데 매우 진지한 눈을 아-주 크게 뜨며 서있는 나를 올려다봤다.


“성착취가 맞아?”


수원역 성매매 집결지의 60년 역사를 ‘성착취 역사’라고 해도 될까. 시민단체에선 성매매 종사자들을 ‘성매매 피해자’라고 하고, 성매매 역시 ‘성착취’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업계 구조는 성착취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전 의미를 그대로 끌고 와서 보자면, 착취가 성립하려면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직접 생산자로부터 그 노동의 성과를 무상으로 취득’ 해야 한다. 따라서 ‘성착취’는 위안부 피해자를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성매매 종사자에게도 성착취란 말을 쓰게 된다면 자칫 위안부와 성매매를 동일시한 모 하버드 교수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꼴이 될 수 있다. 그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건 성착취야’라고 섣불리 판단했다가 그 누구의 입장도 존중하지 않는 꼴이 될 수 있다. 성착취, 이게 내 부담감을 더한 두 번째 단어다.


이 논쟁에 불을 지핀 사회부장이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 건 아니었으나 “성착취가 맞아?”라는 그의 질문은 그보다 많은 걸 얘기해줬다. 혼자 “이건 이러이러해서 아니야”라고 끝낼 수도 있는 일을, 편집부장도 아닌 평기자를 불러다가, 심지어 그 평기자의 의견을 묻고 끝끝내 답변을 들으려고 한 사회부장의 태도에 여러 번 놀랐다. 정확히는, 여러 번 감사했다.


내 부담감의 무게를 더한 두 개의 단어 ‘집창촌’과 ‘성착취’. 제목 안에 꼭 포함돼야 하는 단어를 고르는 것보다, 제목에 포함돼선 안 되는 말이 무엇인지 구분하는 게 훨씬 힘들다. 기사 본문에서 빼야 할 말들을 빼고 남은 단 한 줄이 바로 오늘 헤드라인이다. [성매매 역사 ‘종지부’… 홍등 끄고, 새 빛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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