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경기도 7개 공공기관의 이전지역이 선정됐다. 경기도는 남부와 북부의 지역격차가 심하다. 위쪽으로 갈수록 북한과 가까운 접경지거나 환경 보호를 위해 규제를 받는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발전이 더뎌질 가능성이 큰데, 하필이면 경기도(=수도권)에 속한다는 이유로 중첩규제를 받는다. 이런 지역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공공기관을 북부로 이전한 것이다. 공공기관 이전 지자체는 결정됐는데 아직 정확한 ‘동네’는 결정되지 않았다. 오늘 1면 톱기사를 시작으로 각 이전지마다 펼쳐질 내부 경쟁에 대한 기사가 시리즈로 나갈 예정이다.
처음 뽑은 제목은 [경기도 균형발전 기대 속… ‘유치 2라운드’ 시동] 이었다. ‘경기도 균형발전 기대’는 앞서 설명했듯이 공공기관 이전의 주된 목표니까, 크게 수정될 일 없다고 생각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데스크를 거쳐 딱 이 부분이 수정됐다. 부장님은 “경기도 균형발전도 맞는 말인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라고 말씀하셨다.
[‘낙후 북동부’ 발전 기대 속… ‘유치 2라운드’ 시동]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일은, 다르게 말하면 더 구체적인 불행을 찾아내라는 뜻일까. 경기도 전체의 발전을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는 것보다 ‘낙후한 북동부 지역의 발전’이라고 짚어내는 게 훨씬 구체적이구나. 오늘은 정치 기사라 크게 다가오는 건 없지만 만약 사건 기사였다면 구체적인 불행을 짚어내는 일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불행은 구체적일수록 좋은가. 적어도 신문 제목에선 불행은 늘 구체적으로 명시되는 편을 선호한다. 가령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 정확한 수치가 나오면 좋고, 피해자가 내뱉은 말을 따옴표 안에 그대로 싣기도 한다. 피해자가 어린아이거나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면 더더욱 놓치지 않는다.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소통을 통한 배움’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7p
입사해서 막 이 일을 시작했을 땐 제목에 어떤 슬픔과 불행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걸 꺼렸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문학의 태도(사실은 문학의 여러 태도 중 일부에 불과한) 안에 오랫동안 머무르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신문의 문법은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 앞에 배달된 신문을 펼쳐볼 때, 미처 정신을 다 차리기도 전에 읽는 1면의 헤드라인은 아무런 맥락 없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신형철의 말을 빌리자면, 가뜩이나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이 타인의 슬픔인데 신문은 독자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그 짧은 순간에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을 전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제목은 될 수 있으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건드려야’ 한다. 다만 여느 유사 언론이 그러하듯, 최근에는 정통 언론도 범하는, 타인의 슬픔을 건드리다 못해 터질 때까지 주무르고 들쑤시는 건 견디기 힘들다. 혹여 어느 날 내가 지은 제목이 그런 일에 가담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불안도 늘 지니고 있다. 경기도 공공기관 이전 같은, 불행이라곤 전혀 없는 사안 속에서 언젠가 다루게 될 큰 슬픔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