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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주연 Jun 14. 2021

건드리기, 멈추기

2021년 6월 8일 화요일 편집자의 일기

얼마 전에 경기도 7개 공공기관의 이전지역이 선정됐다. 경기도는 남부와 북부의 지역격차가 심하다. 위쪽으로 갈수록 북한과 가까운 접경지거나 환경 보호를 위해 규제를 받는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발전이 더뎌질 가능성이 큰데, 하필이면 경기도(=수도권)에 속한다는 이유로 중첩규제를 받는다. 이런 지역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공공기관을 북부로 이전한 것이다. 공공기관 이전 지자체는 결정됐는데 아직 정확한 ‘동네’는 결정되지 않았다. 오늘 1면 톱기사를 시작으로 각 이전지마다 펼쳐질 내부 경쟁에 대한 기사가 시리즈로 나갈 예정이다.


처음 뽑은 제목은 [경기도 균형발전 기대 속… ‘유치 2라운드’ 시동] 이었다. ‘경기도 균형발전 기대’는 앞서 설명했듯이 공공기관 이전의 주된 목표니까, 크게 수정될 일 없다고 생각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데스크를 거쳐 딱 이 부분이 수정됐다. 부장님은 “경기도 균형발전도 맞는 말인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라고 말씀하셨다.


[‘낙후 북동부’ 발전 기대 속… ‘유치 2라운드’ 시동]


더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일은, 다르게 말하면 더 구체적인 불행을 찾아내라는 뜻일까. 경기도 전체의 발전을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는 것보다 ‘낙후한 북동부 지역의 발전’이라고 짚어내는 게 훨씬 구체적이구나. 오늘은 정치 기사라 크게 다가오는 건 없지만 만약 사건 기사였다면 구체적인 불행을 짚어내는 일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불행은 구체적일수록 좋은가. 적어도 신문 제목에선 불행은 늘 구체적으로 명시되는 편을 선호한다. 가령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 정확한 수치가 나오면 좋고, 피해자가 내뱉은 말을 따옴표 안에 그대로 싣기도 한다. 피해자가 어린아이거나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면 더더욱 놓치지 않는다.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소통을 통한 배움’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7p


입사해서 막 이 일을 시작했을 땐 제목에 어떤 슬픔과 불행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하는 걸 꺼렸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문학의 태도(사실은 문학의 여러 태도 중 일부에 불과한) 안에 오랫동안 머무르길 바랐으니까. 하지만 신문의 문법은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 앞에 배달된 신문을 펼쳐볼 때, 미처 정신을 다 차리기도 전에 읽는 1면의 헤드라인은 아무런 맥락 없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신형철의 말을 빌리자면, 가뜩이나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이 타인의 슬픔인데 신문은 독자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그 짧은 순간에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을 전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제목은 될 수 있으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건드려야’ 한다. 다만 여느 유사 언론이 그러하듯, 최근에는 정통 언론도 범하는, 타인의 슬픔을 건드리다 못해 터질 때까지 주무르고 들쑤시는 건 견디기 힘들다. 혹여 어느 날 내가 지은 제목이 그런 일에 가담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불안도 늘 지니고 있다. 경기도 공공기관 이전 같은, 불행이라곤 전혀 없는 사안 속에서 언젠가 다루게 될 큰 슬픔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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