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주연 Jun 14. 2021

사건은 1면에 실리지 않는다

2021년 6월 10일 목요일 편집자의 일기

엄마 가슴팍 정도밖에 정수리가 닿지 않던 시절에, 나는 엄마와 시장을 보러 가는 걸 좋아했다. 엄마가 더 좋아했던 것도 같다. 은행에 먼저 들러 ATM기에서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엄마의 표정이 어떻게 오르내리는지를 보는 걸 좋아했다. 나중에 나도 통장을 만들어서 천 원 2천 원씩 용돈을 입금하게 된 이후엔 은행을 더 좋아하게 됐다. 마트에 가면 입구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봉긋하게 한 스쿱 떠주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마트에서 엄마가 물건값을 보고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물건을 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마는 늘 부동산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부동산 유리벽에 붙어있는 온갖 숫자들, 거대한 숫자들을 엄마는 골똘히 읽었다. 나는 엄마가 부동산 앞에서 허비하는 그 몇 초의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 그거 재밌어? 재미없어. 근데 왜 봐? 너도 어른 되면 알 거야. 엄마를 보채며 이런 대화를 했던 것 같다.


[與 임종성 가족이 산 땅, 10배 올랐다]


지난 9일 조선일보 1면 헤드라인이다. 이날 종합 일간지 1면은 모두 민주당이 부동산 투기 의혹이 확인된 의원 12명에게 자진 탈당을 권고했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대부분 제목이 ‘민주당, 투기 의혹 12명 탈당 권유’ 수준에서 변주되는 정도였다. 조선일보는 똑같은 기사 내용에 제목을 저렇게 뽑았다. ‘임종성은 경기 지역 의원인데… 우리 회사에서도 아마 이런 식의 제목을 바라는 기사를 1면 탑으로 올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오늘 1면 탑 기사가 딱 그 내용이었다.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휩싸인 경기지역 의원들과 타 지역 의원들 중에서도 경기지역에 ‘개발 수혜’를 노리고 건물이나 땅을 산 경우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 땅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나열했다. 부제 뽑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의원들이 땅을 어떻게 매입했고 그 땅값이 얼마나 크게 올랐는가를, 나도 기사를 따라서 쭉 나열하면 됐다. 누구는 신도시 땅 인근을‘업무상 비밀’을 이용해 매입했고, 누구는 어디 땅이 몇 배가 올랐고, 시체 차익이 얼마다….


문제는 헤드라인이었다. 아니지, 헤드라인은 항상 문제다,라고 적는 편이 낫겠다. 오늘 1면을 짜면서 유독 헤드라인을 채우지 않은 하얀 빈칸이 무섭게 느껴졌다. 어쩐지 9일 자 조선일보 헤드라인처럼 누군가의 땅값이 얼마나 크게 올랐는지를 수치로 보여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질문이 있었다.


‘땅값이 올랐다’, 그것만으로 제목이 될 수 있는가. 다르게 말하자면 ‘땅값이 올랐다’ 자체로 사건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물가는 항상 오르기 마련이고 땅도 재산이니 그 값은 늘 조금씩이라도 오를 것이다. 처음 뽑았던 헤드라인 [의원들이 사들인 땅 / 안 오른 곳 없다]에 커서를 놓고 한참 쳐다보며 질문했다. ‘이 자체로 사건이 될 수 있을까.’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듯 팔짱을 끼고 제목을 고민하던 때 부장님이 옆에 와서 눈싸움에 가담했다. “땅값이 오르는 건 당연한데… 이걸로는 제목이 될 수 없을 것 같아.”부장님이 불러주는 대로 제목을 수정했다.


[의원들 사들인 땅 ‘개발 수혜’… 안 오른 곳 없다]


땅 값이 올랐다는 것, 만으로는 사건이 될 수 없다. 적어도 1면 헤드라인을 차지할 사건은 못 된다. 그보다 의원들이 업무상 비밀을 이용해서 개발될 지역을 미리 알고 땅을 샀다는, 그래서 ‘개발 수혜’를 입었다는, ‘공정성’을 훼손했다는 게 문제가 될 터였다. 조선일보의 헤드라인 [與 임종성 가족이 산 땅, 10배 올랐다]도 그 뒤에 ‘공정성이 훼손됐다’는 말이 괄호로 묶여 있다.


이날따라 기사 마감이 늦어 고된 몸으로 퇴근했다.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부동산이 바로 보인다. 불 꺼진 부동산 유리벽에 거대한 숫자들 A4용지에 적어 붙여놓는 방식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재미없는 숫자들 앞에 발이 묶인 나는 엄마와 비슷해졌다. 회사에서 혼자 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땅값이 올랐다’ 자체로 사건이 될 수 있는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장을 보러 나와, 은행에서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표정이 오르내렸던 엄마. 그에겐 매일매일 부동산 유리벽에 붙은 A4용지가 커다란 사건이었다. 신문 헤드라인보다 훨씬 강력한 사건.  

이전 11화 건드리기, 멈추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