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패배하지 않기를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편집자의 일기
친오빠와 나는 4살 터울이다. 그래서인지 오빠의 초중고, 대학교 입학을 항상 동경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한두 살 차이면 진학 시기가 비슷하니 그냥 같이 준비한다는 느낌이었을 텐데 4살 정도면 차이가 꽤 크다. 별다른 말썽 부리지 않고 늘 부모님 기대대로 무던하게 잘 해내는 오빠가 대단했다. 나와는 달리 하기 싫은 일 앞에서도 엄살이나 꾀를 부리는 법도 없었다. 그런 맏이를 위해 부모님은 당시 본인들이 해줄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것을 해주려 늘 노력하셨다.
오빠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여러 학교 이름을 듣게 됐다. 한일고, 동산고, 상산고…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이 학교들에 온 가족의 미래가 걸려있기라도 한 듯했다. 하루는 한일고 입시설명회를 듣기 위해 온 가족이 충남 공주 한일고에 갔었다. 나도 간 걸 보면 휴일이었겠지. 휴일에도 부모님은 가게 장사를 했기 때문에 오픈 시간을 늦추고 최대한 빨리 설명회를 듣고 출발해야 했다. 오픈이 늦어질까 4명 가족이 탄 6인승 카니발이 고속버스 전용 차도로 질주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호프집으로 향하는 그 긴박한 차 안에서도 부모님은 자식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재학생 몇 명이 설명회 안내를 도왔는데, 안내를 하는 와중에도 손에 단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며,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학교가 있어 공기가 맑다는 얘기며… 결국 오빠는 그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다만 카니발을 타고 고속버스 뒤를 쫓아가던 그날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오빠에게 온 가족의 미래가 달려있기라도 한 듯, 그 오빠의 미래가 특정 고등학교에 달려있기라도 한 듯, 초조하게 미래를 더듬어갔던 부모님의 대화까지도.
현재 자사고는 설립 취지대로 교육의 다양성을 실현하기보다는 입시학원처럼 운영되고 있다. 대학교도 모자라 고등학교까지 서열화를 조성하는 폐해가 벌어지고 있다. 교육부가 2025년까지 고교 학점제를 도입하고 자사고를 폐지한다는 건 이런 병폐를 없애기 위함이다. 교육당국이 ‘자사고 취소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에 연이어 패소했고, 10개 학교 중 마지막으로 소송이 남은 안산 동산고의 소송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는 게 오늘 1면 세컨 기사의 요지다.
[자사고 취소 10전9패… 안산 동산고 소송 결과 주목]
기사에 취재기자가 붙여둔 가제목이다.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려 한 교육당국 입장에선 ‘10전9패’가 맞고, 반대로 지위를 유지하려 소송을 건 자사고 입장에선 ‘10전9승’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가제목대로 교육당국 입장에서 ‘자사고 취소 10전9패’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학교 입장에서 ‘자사고 10전9승’이라고 써야할지 고민됐다. 주체를 누구로 두느냐에 따라 뒤따르는 승리와 패배도 결정된다.
[자사고 10전9승… 마지막 동산고 ‘주목’]
결국 내가 결정한 제목은 글자 수가 조금이라도 적은 쪽이었다. ‘자사고 취소 10전9패’보단 ‘자사고 10전9승’이 짧으니까. 어쩐지 ‘자사고, 판정승’하며 자사고의 팔을 들어준 링 위의 심판이 된 기분이었다. 맏이의 고고 진학을 위해 온 가족이 충남 공주로 향했던 그날. 허울뿐인 명성인지, 신기루 같은 꿈인지 모를 그 명문고 입학을 이루기 위해 고속버스 전용차도를 달렸던 그날. 그날의 우리 가족도 마치 링 위에서 판정승을 기다리는 복서가 된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라는 일은 얼마나 많은 줄 세우기를 거쳐야 끝이 나는 걸까. 어느 학교에 진학하는 것과 상관없이 아무도 패배하지 않는 싸움이기를 바라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아침에 배달 온 1면을 보면서, 내가 결정한 제목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지난한 싸움에서 아무도 패배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