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혹은 무림일기
2021년 5월 31일 월요일 편집자의 일기
입사 첫해에 뭣도 모르고 총선을 치렀다. 신문사에서 선거 날은 빨간 날이 아니라 가장 바쁜 날이다. 회사에서 맥주 한잔을 곁들인 야식을 먹고 정신없이 자정 12시 남아서 지면에 실리는 국회의원들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는 날. 무섭게도 내년엔 전국단위 선거가 2개나 예정돼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지방선거와 대선.
아무래도 지역 일간지에선 대선보다 지방선거에 더 쏟는 에너지가 더 크다. 오늘 1면도 지방선거 D-1년을 맞아 가장 중요한 도지사 선거 각축전의 향방을 예측하는 기사가 실렸다. 현 경기도지사인 이재명이 여권 대선주자 선두라서 이 지사의 행방이 여야 후보경쟁에 가장 중요하다. 만약 민주당 대권 경선에 이 지사가 승리하면 9월에 도지사직을 내려놓지만, 패배하면 이 지사가 도지사 재선 도전을 할 수도 있다. 그럼 후보군에 지각변동은 불가피하다.
오늘 기사에서 밀고 있는 포인트는 도지사 후보가 여당은 넘쳐나는 데 비해 야당은 현저히 적다는 것이다. 톱제목으로 [‘여多야少’도지사 후보군 …]은 정해졌고, 문제는 ‘…’ 뒤를 채울 문장이었다. 나는 ‘민심’에 포커스를 두고 문장을 완성했다. 문 대통령이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죽비’에 비유한 민심. 도지사를 뽑는 지방선거도 그렇지만 지방선거 3개월 전에 치러지는 대선까지, 결국 선거를 움직이는 건 죽비 같은 민심이라는 생각이었다. [‘여多야少’ 도지사 후보군… ‘죽비’ 민심잡기 관건 ] 이 제목을 맨 처음 데스크에 올렸다.
여야 도지사 후보 경쟁과 민심.‘…’으로 이어지는 이 두 키워드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거나, 너무 추상적인 연관성만 갖고 있다고 판단했을까. 데스크를 거친 제목에서 ‘…’뒷말이 수정됐다. [‘여多야少’후보군… 최대 변수는 李지사] 이렇게.
선거 관련 기사를 읽다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선거 기사에 쓰이는 어휘사전은 무협지의 어휘사전과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 ‘시간’과 ‘돈’에 관련된 표현들이 ‘시간/돈을 쓴다’‘시간/돈을 뺏기다’‘시간/돈을 벌었다’‘시간/돈이 모자라다’처럼 똑같이 겹치는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오늘 기사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라는 문구가 있는데, 태어나서 ‘건곤일척’이란 사자성어가 어떤 글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해서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이건 무협지의 어휘사전에 들어갈 법한 사자성어 아닌가. 선거 기사에서 후보 이름에 여포나 장비 같은 장수 이름을 대신 넣어 읽어보면 꽤 흥미진진한 무협지 한 편이 쓰일 것 같다.
그래, 정치기사를 다룰 땐 무협지의 작가가 됐다고 생각하는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무협지에서 남는 건 결국 ‘인물’이니까. 경기일보라는 출판사에서 내는 지방선거 섹션 무협지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그분, 李가 되시겠다. 적어도 내년 대선, 지방선거까지 남은 1년 동안 주인공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늘 1면이 그 무협지의 1막 1장이라고 친다면 ‘인물’이 빠져서야 쓸까. 내 마음속에 ‘최대 변수’는 언제나 ‘죽비 같은 민심’이겠지만, 선거 관련 기사를 1면 톱으로 만날 때는 언제나 무협지의 저자가 됐다고 생각하자.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가 빌려놓은 요란한 표지의 무협지들을 좀 들춰볼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