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Chu Oct 18. 2022

무작정 걷고 싶다면 무조건 여기

평화누리길 12코스 ‘통일이음길’

일상의 안과 밖


브런치 알림 메시지가 울렸다. 

‘작가님의 글을 본 지 무려... 150일이 지났어요 ㅠㅠ’ 

11코스를 다녀온 지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다니... 그간 대선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40년 만에 라켓을 들고 테니스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공을 쫓아다닌 끝에 얻은 것은 동호회 지인 30여 명과 아킬레스 건염. 왜 사람들이 테니스를 시작하면 거기에 미치게 되는가는 따로 정리하도록 하고, 아무튼 덕분에 울화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음에 감사~.


신탄리역 철도종단점. 종단점이 더 북쪽으로 옮겨지며 철마는 사라지고 팻말만 남았다.  


일상 안에 취미가 생기면서 누리길을 등한시 하고 지내다가, 마음 한 구석 늘 자리하고 있던 누리길을 다녀오고서야 일상의 작은 틈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일상 안의 취미는 일상을 벗어나는 취미를 대체할 수 없었다. 취미는 일상 밖에 존재하는 무엇이 될  때 각성효과가 크다는 사실을 이번 여정으로 깨달았다. 


떠나기 연습


평화누리길에 오른 지 3년 만에 경기도 12개 코스 중 마지막 길을 걸었다. 해외여행도 아닌, 하루 도보여행을 왜 이토록 매번 망설이고 망설이는지... 가지 못할 핑계는 언제나 많다. 누리길의 출발점이 멀어질수록 가고 오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 하루에 끝내지 못할 것에 대비해 해 본적 없는 백패킹을 하려하니 준비할 것이 많아졌다는 것 등등. 하지만 진짜 이유는 오직 하나. 일상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습성 때문. 

떠남을 미루면 영영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 나에겐 더 가볍게 떠나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래서 평화누리길을 계속 이어 걷고 있다.


신탄리역


20km 내외의 길을 걸으며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일은 꽤나 매력적이다. 작은 여행을 모아 대장정을 만들어가는 여정. 오로지 두 발로 길고 가는 길을 이어가며 풍경들에 그때의 생각들을 새긴다. 그렇게 내 인생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통일이음길로 가는 길


평화누리길 12코스의 이름은 통일이음길이다. 말 그대로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의 누리길을 잇는 구간이다. 큰 기대감은 없었다. 이미 11코스에서 누리길의 절정감을 맛보았고, 대개 관할 행정구역이 바뀌는 지점의 누리길은 관리가 허술한 법. 그저 의무적으로 길을 이어야 하는 길고 황량한 길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걷는 내내 길은 쾌적했고, 풍경은 장대했으며, 여러 차례 엔딩의 감동을 선사하는 멋진 길이었다.  


차탄전길


12코스는 연천의 마지막 구간으로, 군남홍수조절지 두루미공원 – 옥녀봉 – 청화산 – 신망리역 – 차탄천변 길 – 신탄리역 – 역고드름 을 지나고, 이후로는 노동당사, 백마고지, 고석정 등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의 강원도 누리길로 이어진다. 출발지와 종착지에서 오고 가는 길 각각 4시간이 걸리는 것에 더해 경기도 내 구간 중 가장 긴 거리인 28km를 걸어야 하는 코스. 캠핑준비로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당일치기를 목표로 집을 나섰다. 일단 떠나고 보자는 마음이 강했다. 완주는 못할 것이 뻔하고 대중교통 이용이 수월한 대략 20km 지점인 신망리역 정도에서 돌아올 심산이었다. 다른 때보다 한참 이른 시간인 오전 7시에 집을 나섰다. 그래도 오늘 안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다.


차탄전길


연천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로 동두천역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전곡으로,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할 것이었다. 동두천역에 도착한 것은 9시. 지하철 역 바로 앞에 경원선 대체버스가 서있었다. 아마도 경원선 연장공사를 하면서 열차운행을 중단하게 되자 통근버스를 운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선은 경원선을 따라 동두천역 - 소요산역 - 대광리역 - 신탄리역 – 백마고지역. 버스를 보자 먼저 신탄리역으로 가 거꾸로 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가이 들었다.  해가 지는 5시 무렵 전까지 25km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지만,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시간을 줄이면 조금이라도 더 걸을 수 있을 것이었다. 


경원선대체버스 - 사진출처 나무위키


무작정 걷기 좋은 차탄천길


본의 아니게 거꾸로 걷게 된 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우선은 12코스 자체가 너무나 멋진 길이었다. 산 두 개와 긴 천변길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쾌적한 가을풍경 가득한, 그야말로 걷기에만 전념할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그곳을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무작정 걷고 싶다면 무조건 여기라는 강한 확신이 왔다. 


여기에 더해 코스를 거꾸로 걸었을 때 그 매력이 더해졌다. 신탄리역에서 신망리역까지의 차탄천 길은 산들물이 어우러진 호젓한 산책로로 그야말로 무작정 걷기에 더없이 쾌적한 구간. 제대로 걸었으면 산 두 개를 넘고 나서 지친 몸으로 쫓기듯 걸어야 했을 테지만, 거꾸로 걸은 덕에 가을의 풍경과 하늘, 호젓한 길을 날아갈 듯 즐기며 걸을 수 있었다. 


차탄천길
차탄천길


차탄천길에서 벗어나, 작고 아담하고 텅 빈 신망리역을 지나, 청화산을 오른다. 역시 산행은 바싹 마른 가을이 최고. 어느 가문의 커다란 산소 말고는 인적이 없는데도 좁지도 넓지도 않은 등산로가 잘 닦여 있었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황량한 이음길일 줄 알았건만, 지금까지 걸어 온 누리길 중 가장 자연과 가깝고, 정갈한 길이었다. 도로와 철길은 물론이고 도보길조차 자연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모습이라 걷기도, 보기도 좋았다.  


신망리역


고개 넘기


아무리 낮은 산도 열 개 이상의 고개를 오르고 내려야 건널 수 있는 법. 이 작은 산에도 고개가 이리 많거늘, 사람사는 세상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요사이 작은 난관에도 화를 내고, 그것이 마지막 고개이기를 바라며 조급해 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을 하든 적어도 열 번의 고개를 넘기 전까지는 불평하지 말자. 살아 있는 한 마지막 고개는 없다. 그러나...

 

청화산의 자작나무숲 길


내 앞에 놓인 고개야 그렇다쳐도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는 우리의 평화는 어쩐단 말인가. 평화가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미끄러져 끝모를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추락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굴러떨어진 나락에서 다시 기오르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갈림길에서 전쟁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행복할까...  


촹화산과 옥녀봉 사이 옥계리 마을 


그리팅맨의 거대한 인사, 옥녀봉의 전망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청화산을 넘어, 옥계리를 지나, 다시 옥녀봉을 올랐다. 20km 가까이 걸어 온 탓에 몸은 고되었지만, 더 이상 고개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고개는 높은 곳에 오르는 자연의 방식, 더 많은 고개를 넘을수록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었다. 조급한 마음은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 뿐. 그런다고 고개가 낮아지거나 줄어들지는 않으니까... 이런 생각을 마음에 새기며 산을 올랐다.


기울기 시작한 해를 보며 반 뛰다시피 오르는데도 다리가 잘 버텨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이게 다 테니스 덕분이겠지? 테니스를 시작한 것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울분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고... 곧 대륙으로 향하리라는 부푼 꿈으로 시작한 길. 걷기에 더없이 좋은 길을 만나 행복한 와중에 다시 머리 한 구석이 개미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옥녀봉 오르는 길. 차도 오를 정도로 넓게 진입로 공사 중. 

 

드디어 옥녀봉에 올랐다. 거대한 조형물인 그리팅맨과 360도로 터진 전망. 그리팅맨이 북녘을 향해 거대한 인사를 하고 있고, 지난 날 혈투의 현장이었으나 지금은 평화를 꿈꾸고 있는 철원 땅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동서남북 나와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 갈 길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 장대한 전망이 길고 길었던 평화누리길의 마지막 선물인 것만 같아 온몸에 전율이 밀려왔다. 거꾸로 길게 걸어 온 덕에 더 감격스럽고 멋진 결말을 만났다. 멋진 풍경은 왜 언제나 희망과 의욕을 샘솟게 할까?  


북녘을 향해 인사라고 있는 그리팅맨


옥녀봉에서 바라본 철원평야와 북녘 땅


그리팅맨 처럼 누군가는 계속 북녘을 향해 평화의 인사를 해야겠지. 이 길을 걷고, 쓰며 들리지 않을 인사를 전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겠지... 하며 긴 하산을 시작했다. 


다시 만난 임진강의 도도한 물길이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지는 해에 쫓겨 달려내려오는 길. 허벅지가 터질 듯 쥐가 올라왔지만, 임진강 상류를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감흥이 더더욱 찌릿했다. 내 두발로 서해로부터 강물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벅찬 감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개안마루와 임진강


군남홍수조절지

완벽한 결말


그렇게 출발지였어야 할, 그러나 어쩌다보니 종착지가 된 군남홍수조절지 두루미공원으로 내려왔다. 공원입구에 놓인 스탬프함을 찾아 경기도 12개 코스 마지막 스탬프를 찍었다. 바로 갔으면 출발할 때 찍었을 도장. 거꾸로 왔기에 완주와 동시에 도장을 찍는 완벽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강원도라는 새로운 장이 시작될 것이었다. 다리는 천근만근이지만 마음은 벌써부터 동해안의 고성을 향하고 있었다.     


12개의 도장을 다 채웠지만 인생에도, 평화에도 끝이란 없다. 살아 있는 한 고개는 계속된다. 

평화누리길 한구간, 한 구간은 나에게 '떠나는 연습'의 장이자 '끝없는 고개넘기 연습'의 장이다.  


경기도 평화누리길 12th 마지막 스탬프

집으로 오는 길


집으로 가는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4시간.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다.  오늘 안에 어둠 너머에 있는 나의 가족과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둡고 썰렁한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보면 불 켜진 시골집들이 왜 그리 따뜻해보이고, 어김없이 나의 가족과 집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겨우 한나절이 지났지만 마치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기분.  


나는 오늘 걸어야 할 길을 다 걸었고, 오늘 빌어야 할 평화를 다 빌었으므로... 

나의 일상과 가족이 있는 따뜻한 집에서 쉬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리길의 절정을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