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소중한 존재-아이가 보는 세상
1. 상황극
아이가 세 살 무렵부터 인형놀이를 하고 놀았다. 역할놀이라고 해야 하나, 1인 다역으로 목소리를 바꿔가며 피겨인형 따위들에게 인격을 부여했다. 그러다가 인형 없이 본인이 직접 여러 가지 역할로 변하는 놀이로 발전했다.
“엄마 무슨 소리 안 들려요?”하길래,
“모르겠는데?”하니까,
“아우우우우우-.”
“엄마 방금 무슨 소리가 났는데?”
뻔뻔하게 엄마 눈 앞에서 늑대 흉내를 내고서 시침을 뗐다.
그렇게 하루에도 여러 번 상황극을 했다. 어떤 날은 토끼가 되어서 또끼 머리띠를 하고 온 방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어떤 날은 개구리가 돼서 ‘개굴’ 소리를 말끝마다 붙이며 울어댔다. 또 하루는 곤충이 되었다. 이불을 둘둘 말아 기어 다니는 걸 보니 애벌레가 된 모양이었다. 난데없이 '꼬물꼬물' 입으로 소리 내며 방바닥을 기어 다니기에 물어봤다.
“뭐하고 있어요?”
나는 빤히 보이지만 아는 척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나는 애벌레예요. 먹이를 찾아 기어 다니고 있어요, 꼬물.”
“지금 애벌레구나, 어쩐지!”
“네! 애벌레는 나뭇잎을 먹어요, 지금 나뭇잎 찾아다녀요.”
나도 덩달아 시침을 떼더니 애벌레는 더욱 힘차게 꼬물거렸다. 나뭇잎을 찾아보라며 여긴 정글이란다. 그래 애벌레는 나뭇잎을 먹고 번데기가 되어 긴 시간을 견딘 후에 나비가 되겠지. “옛다, 나뭇잎” 하고 주는 시늉을 했다.
“애벌레는 이 나뭇잎 먹고 커서 뭐가 돼요?” 물어봤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큰 애벌레!”라고 답한다.
“그래, 많이 먹고 애벌레가 큰 애벌레가 되지. 큰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었다가 나중엔 나비가 돼요.”
한껏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비? 애벌레는 애벌렌데 나비라니 왜? 나비는 나비잖아!”
“아니야, 나비가 아기일 때가 애벌레인 거야. 애벌레가 커서 나비로 변신하거든.”
나는 열정적 TMI모드를 발동해 듣는 이는 궁금해하지도 않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과장된 몸짓으로 커다란 나방처럼 양팔을 펄럭거리면서. 아이의 앙다문 세모 입은 "아휴, 애벌레랑 나비는 다르다니까. 엄만 뭘 몰라.”라고 했다.
똑같은 설명을 또 하고 또 하니, “나는 애벌레야. 나비가 아니고!”라고 성을 냈다. 나도 질 수 없었다. 옳은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엄마라는 사명감에 물러서기 싫었다.
"나비가 되려면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어서 변태를 겪어 허물을 벗어야 한다니까." 나는 아이가 모를 단어를 마구 쏟아냈다.
아이의 얼굴에는 ‘엄만 몰라!’ 표정과 ‘그게 뭐야?’ 물음표가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도무지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아닌데 싶은 느낌에 말문이 막힌 나는 몇 초 안 되는 찰나에 온갖 생각을 했다. ‘변태’라는 한자 뜻부터 설명해 주고 의미를 설명해 주면 이해를 할까. 아님 지금 당장 유튜브를 검색해 눈앞에 보여줄까. 아니 아니 너무 영상을 많이 보여주는 건 어쩐지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변태를 뭐라고 다르게 말하면 될까. 애초에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거 맞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쓸데없는 설명충은 그만두고 그냥 그런 거라고 우겨볼까. 나이스하고 스위트 한 배운 엄마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에 급히 우울함이 밀려왔다. 결국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애벌레는 커서 나비로 변신하는 거야."
"애벌레는 땅에 살고 나비는 날잖아. 정말 다른 거라고." 지지 않는 아이에게 한 번 더 같은 말을 조금 길게 설명했다.
"말도 안 돼!"
단호한 대답을 끝으로 꼬물거리는 아이는 나뭇잎을 먹고 보란 듯이 큰 애벌레가 되었다.
그랬다. 그게 뭐 대수로운 것이라고. 그의 세상은 애벌레와 나비가 있을 뿐이고 그들은 너무 다르게 생겼다. 그깟 사실이 지금 누구에게 중요한가. 나비는 날고 애벌레는 기어 다닌다. 이 아이의 무한한 세상을 짓밟고 애벌레와 나비에 대한 작은 지식으로 설명충이 되다니, 엄마로서 꽝이다.
창의력을 길러야 한다면서 창의력 학원을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 발견하고 자연의 놀라움을 경험할 기회를 줘야 하는데 말이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다. 궁금증을 가지고 관찰하고 질문을 하도록 기다려야 하는데, 생각할 시간을 빼앗아 버렸다. 아니 그전에,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도 되는 상황극을 생명 다큐로 만들려고 했다.
자책을 하다가 문득, 나는 여태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할 시간을 나에게 주었던가 생각했다. 누군가 이게 옳다고 알려주면 당연히 그게 맞다고 습득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어린 나는 질문을 많이 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어른이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인 줄 알았다. 어른들에게 귀찮게 따박따박 따지고 들지 않는 ‘착한’ 아이였다. 아니다. 나는 착하지 않았다. 그저 수동적인 것뿐이었다.
아이는 엄마가 말하면 그 말이 맞다고 할 줄 알았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엄마와 척을 지고 자기주장을 세울 줄 몰랐다. 아이의 예상치 못한 대답은 편협한 나의 연못에 돌멩이를 마구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