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우은우 Nov 17. 2017

마성의 유치원

 


   우리 아이들은 너희들은 뭐든 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도무지 밑도 끝도 없는 믿음을 가진 나 같은 엄마를 둔 덕에 일본어라고는 정말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상태로 와세다 유치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처럼 매사에 낙관적인 나마저도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 첫날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할 텐데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서 엄마, 아빠 없이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가 유치원이 끝날 무렵 둘이 도대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나오게 될지 너무도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라? 아이들은 예상과 달리 너무도 밝고 환한 모습으로 유치원 건물을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둘이 완전히 신이 나서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등원 첫날부터 이 유치원을 너무도 좋아했던 우리 아이들은 그 후로도 1년 내내 단 한 번도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쓴 적이 없었다. 일본어에 익숙해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 언어 때문에 알게 모르게 꽤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유치원에 가는 것만큼은 언제나 좋아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게 꼭 우리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6월 즈음 유치원에 한 남자아이가 새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이 아이는 아빠가 미국인이고 엄마가 일본인이었는데 방학 때 1달 정도 일본 유치원을 체험하러 들어온 아이였다. 엄마가 일본인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어를 거의 못하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며칠이 지나자 금세 유치원에 적응했다. 신기한 마음에 내가 그 엄마에게 슬쩍 물어보니 그 엄마는 내게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게요. 저도 걱정했는데 금세 적응하더라고요. 이 유치원을 정말 좋아해요. 다니기 시작한 첫날부터 좋아했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9월에 호주에서 새로 들어온 한 여자아이의 엄마도 내게 똑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가 유치원을 너무나 좋아한다고. 말이 안 통해서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바로 그 첫날부터 이 유치원을 너무나 좋아했다고 말이다. 이건 다른 엄마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와세다 유치원은 사실 엄마들에게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아 무척이나 힘든 유치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유치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건 하나같이 다 아이가 이 유치원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곳은 국적, 인종, 언어를 불문하고 어떤 아이든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마성의 유치원’이었다. 


   와세다 유치원에는 만 3세 반인 아기새반 (고토리 구미), 만 4세 반인 딸기반 (이치고 구미), 그리고 만 5세 반인 달님반 (츠키 구미)이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가장 연장자 반인 달님반이었다. 각반마다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생활하고 있어 원생을 다 합쳐봐야 6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무척이나 아담한 유치원이었지만 그래 봬도 무려 7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래된 유치원이다 보니 시설은 무척 낡은 편이었지만 일본이란 나라가 그렇듯 구석구석 아주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어 아이들이 생활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었다. 


   유치원 앞에는 작은 놀이터 겸 정원이 딸려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서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미끄럼틀을 타고 흙놀이를 하고 벌레를 잡고 다 같이 모여 피구를 하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나 벌레 잡기를 무척 좋아했던 우리 아이들은 가끔씩 유치원에서 잡은 벌레를 예쁘게 포장해서 집으로 들고 오기도 했다. 환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으로부터 오늘 아이가 잡은 벌레라며 꿈틀꿈틀 대는 커다란 초록색 애벌레가 고이 담긴 곤충 채집통을 처음 건네받았을 때의 그 당혹스러움이란 지금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그 외에도 유치원에는 토끼, 거북이, 가재, 장수풍뎅이 등 아이들을 위한 동물들이 무척 많았는데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동물들을 아이들이 직접 키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유치원을 다닌 지 한 달쯤 지난 후 공개수업에 가서 보게 된 것인데 와세다 유치원에는 당번 활동이 있었다. 아이들이 매일 아침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활동인데 그 맡겨진 일이라는 게 다름이 아니라 토끼의 배설물을 청소하고 거북이 목욕을 시켜주고 가재가 있는 어항의 물을 갈아주고 꽃에 물을 주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 많이 해본 듯한 아주 능숙한 솜씨로 토끼의 배설물을 치우고 거북이를 직접 목욕시켜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내게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와세다 유치원에서는 시골에 있는 유치원에서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자연체험 활동들을 정말 많이 했다. 다 함께 모여 근처 공원으로 가재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잡은 가재 중 몇 마리는 유치원으로 가져와서 아이들이 함께 키웠다) 모내기 체험을 하기도 했으며 고구마 캐기 체험을 다녀와서는 가져온 고구마로 유치원 놀이터에 불을 피우고 다 같이 군고구마 파티를 하기도 했다. 한국 유치원에서도 무나 고구마를 캐러 가는 체험은 몇 번 해봤지만 캐온 고구마로 유치원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 군고구마를 만들어 먹다니. 아, 이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군고구마 파티 말고도 초여름쯤에는 비파 파티라는 것도 있었다. 처음에 유치원 안내문에서 비파 파티라는 말을 보고는 이게 도대체 뭘 하는 걸까 굉장히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유치원에 있는 한그루의 커다란 나무에 열려 있던 비파라는 열매를 따서 온 유치원생들이 다 함께 나누어 먹는 행사였다. 


   유치원의 시설을 관리해주시던 아저씨분들께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열심히 비파 열매를 따주시면 아이들은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그걸 받아 깨끗이 씻어 서로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나는 이것이 정녕 도쿄, 그것도 신주쿠 한복판에 있는 유치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유치원에서 방학 때 내준 숙제들도 내게는 꽤 참신했다. 그 숙제들이란 방학 며칠 전에 아이가 유치원에서 직접 만든 나무 팽이로 팽이치기 연습을 하는 것과 1리터 페트병으로 곤충 채집통을 만들어 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다. 동화책 읽기나 그림일기가 숙제가 아니라 팽이치기 연습과 곤충 채집통 만들기가 방학 숙제라니. 


   하지만 여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방학이 끝나고 유치원에서는 팽이치기 대회가 열렸고 방학 동안 만들어 온 곤충 채집통을 들고 다 같이 근처 공원으로 곤충 채집 소풍을 떠난 것이다. 아, 이러니 아이들이 이 유치원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외에도 와세다 유치원에서는 여름 축제, 가을 운동회, 학예회, 음악회, 떡 만들기 행사 등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행사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후에 하나하나 다 자세히 이야기하게 되겠지만 아이들은 이 모든 행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행사의 주인공으로서 그 몫을 충실히 해냈다. 말 그대로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의 행사였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독서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물론 와세다 유치원에도 잘 만들어진 어린이 도서실이 있었고 도서 카드를 만들어 책을 빌려 읽는 것을 권장하는 분위기였지만 우리나라에서처럼 어릴 때의 독서습관이 아이의 미래를 만든다는 식의 지나친 강요는 없었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문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치원에서 따로 시간을 들여 히라가나나 가타카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딱히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일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와세다 유치원의 프로그램들은 주로 놀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 놀이란 말 그대로 놀이였다. 우리나라에서처럼 놀이를 통해 영어를 배우고, 놀이를 통해 수학을 배우고, 또 놀이를 통해 뭔가를 배우는, 결국엔 뭔가를 배우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놀이가 아니라 그냥 온전한 놀이 그 자체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와세다 유치원의 놀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웠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은 원 없이 뛰어놀며 매시간 그 순간순간을 즐겼고 시간이 지나도 절대 잊지 못할 유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들을 수없이 만들었다. 난 내 아이들에게 와세다 유치원에서의 1년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91748369





이전 01화 아이는 아이답고, 가족은 가족다울 수 있었던 시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