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기 전에 한 인터넷 카페에 아이들을 일본 유치원에 보내는 문제에 관한 질문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글에 달린 많은 댓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아이가 외국인으로 등록이 되면 일정 기간 한국인 통역 선생님이 아이의 옆에서 적응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본에 간다는 것 자체가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았을뿐더러 딱 보기에도 너무 비현실적인 내용이라 ‘한국인 통역 선생님이라니 설마. 말도 안 돼.’하는 마음으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일본에 도착해서 와세다 유치원에 면접을 보러 갔다. (일본 유치원들은 입학 전에 아이와 학부모의 면접을 보는 과정이 있다)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시간이 되자 문득 그 댓글 내용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물어나 볼까 하고 망설이던 차에 유치원 원장 선생님과 원감 선생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
“아직 일본어를 잘 하지 못하는 외국인 아이들을 위해 신주쿠구에서 일본어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신청하시겠습니까?”
그렇잖아도 아이들의 일본어 문제로 꽤 고민 중이었던 우리는 당연히 ‘네’라고 대답했고 그 후부터 우리에게는 정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사실 우리가 국제 유치원이나 사립 영어 유치원 같은 곳을 배제하고 아이들을 일본의 현지 구립 유치원으로 보내게 된 데에는 비용적인 측면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와세다 유치원의 경우 한 달 원비가 7만 원 정도였고 그나마도 두 아이를 함께 보내게 되면 형제 할인이 되어 둘이 합쳐 총 10만 원 정도여서 거의 공짜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세다 유치원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와세다 유치원을 관할하고 있는 신주쿠구에서 외국인인 우리를 위해 제공해주는 프로그램들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아이들이 유치원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만을 위한 개별 통역 선생님이 배치되었다. 아이들을 맡은 선생님은 당연히 한국어가 가능한 한국인 선생님이셨고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두 시간씩 무려 한 학기가량이나 도와주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인 면담이나 학교에 특별 행사가 있을 시에는 요청만 하면 학부모를 위한 통역 담당자도 따로 배치되었다. 가끔은 신주쿠구의 담당자가 우리 아이들이 잘 적응을 하고 있는지 함께 와서 직접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지원 프로그램들은 모두 무료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와세다 유치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월별 일정표를 나누어 주었는데 신주쿠구에서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그 일정표를 매달 영어와 한국어판으로 따로 제작해서 준비해 준 것이다! 며칠 전 이 글을 쓰기 위해 따로 모아두었던 그 일정표들을 꺼내서 읽고 있었는데 옆에서 남편이 이런 말을 건넸다.
“대단해, 진짜. 단순히 우리 때문에 이걸 굳이 따로 만든 거잖아?”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와세다 유치원, 그중에서도 달님 반에서 한국어 일정표를 필요로 하는 가족은 딱 한 가족, 우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가족만을 위해 신주쿠 구청에서는 매달 시간과 노력을 들여 따로 한국어 일정표를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방인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단순히 정부나 유치원 차원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새로 달님반의 일원이 된 우리 가족을 위한 학부모 환영 모임이 있었을 때였다. 달님반의 한 엄마가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하면 연우와 은우가 친구들의 이름을 잘 알아보고 익힐 수 있을까요?”
그 엄마가 보여준 커다란 종이에는 선생님과 달님반 친구들 한 명 한 명의 사진이 붙어 있고 그 밑에 각각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잘 보니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름이 히라가나뿐 아니라 한글로도 함께 적혀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우리는 절대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 이름들을 다 한글로 알아냈으며 또 누가 그걸 일일이 다 한글로 적었는지도 참 대단할 뿐이었다.
한 번은 일본에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급작스럽게 일이 생겨 잠시 한국에 다녀왔는데 그때 한국 과자들을 좀 챙겨다가 유치원 친구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각각의 선물 위에 친구들의 이름을 히라가나와 한글로 함께 적어서 스티커로 붙여주었는데 몇몇 엄마들은 그 스티커를 떼어 자기 아이의 이름표에 따로 붙여 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스티커에 적힌 한글 이름을 보고 좀 더 쉽게 자신의 아이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 정말이지 일본인들의 그 세심한 배려란!
와세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구립 소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소학교 입학 전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나누어준 단체 안내문에 영어와 한국어, 중국어는 물론이고 태국어와 네팔어, 그리고 미얀마어가 함께 적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학교의 예비 1학년 학부모 중에 태국인과 네팔인, 그리고 미얀마인이 있었으리라.
이처럼 일본인들의 배려는 그냥 보여주기식의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체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고 그 사람들에게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뭔가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소수의 외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처럼 뭐 하나 특별할 게 없던 정말 평범한 외국인들에게도 이러한 모든 혜택이 다 주어진다는 것이 내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러한 일본 특유의 배려 문화와 시스템은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 ‘흥! 일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게 ‘아! 일본!’이라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준 가장 큰 계기가 되어 주었다.
1년 반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한국과 일본의 다른 점들이 더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단연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었다. 우리는 내가 아닌 남에게 어느 정도의 배려를 하고 있을까? 우리의 배려 문화는 과연 어디쯤 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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