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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은우 Dec 08. 2017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로 와세다 유치원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등원 첫날부터 유치원 생활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선생님들도 놀라실 만큼 아주 빠르고 성공적으로 유치원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물론 그 모든 과정이 100% 다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저 신기한 마음에 별생각 없이 잘 생활하던 둘째 아이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언어의 장벽에 막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다 하지 못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늘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던한 성격인 첫째 아이와 달리 자기주장도 강하고 승부욕도 넘쳤던 둘째 아이에게는 그런 상황이 당연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는 친구들과 의견 다툼이 있을 때면 자신의 입장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 종종 친구들과 싸움을 벌였고 그 답답함이 심해지면 큰 소리로 울고 떼를 쓰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해 내곤 했다. 가끔 선생님에게 그런 상황을 전해 들을 때면 조금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만 아이는 기본적으로 유치원을 좋아하고 있었고 어쩌다가 그런 일이 있을 때를 빼고는 대부분 별문제 없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아이의 일본어가 어서 자리를 잡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혼자 아이들을 데리러 유치원에 갔던 남편이 잔뜩 화가 나서 씩씩대며 아이들과 함께 집에 돌아온 것이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둘째 아이가 그날 유치원에 집에서 놀던 장난감을 가지고 갔는데 선생님에게 들켜서 선생님이 집에 갈 때 돌려주겠다며 그 장난감을 압수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부터 화가 난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울고 떼쓰는 바람에 유치원 프로그램이 진행되지 못할 정도가 되어 선생님들이 굉장히 난감한 상황을 겪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은 선생님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한 백번은 넘게 하고 온 듯한 표정이었고 한참 아빠에게 혼이 난 아이는 아직도 자기감정을 다 추스르지 못한 듯 보였다. 


   사실 둘째 아이는 한국에서도 유치원을 2년이나 다니다 왔지만 나는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이는 한국 유치원에서는 상당한 모범생이었다. 친구와는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었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붙임성도 좋아 늘 칭찬만 받던 아이였다. 그렇다 보니 이런 상황이 무척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유치원에 집에서 놀던 장난감을 들고 가면 안 된다, 규칙이 그러하니 선생님이 그 장난감을 가지고 가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화가 난다고 해서 그렇게 무조건 울고 소리를 지르며 떼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해주고 아이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네가 계속 이렇게 울고 떼를 쓰며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면 앞으로는 더 이상 유치원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뒤 아이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함께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유치원 하원길,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께서 내게 상담을 요청하셨다. 그날은 남편 없이 나 혼자 유치원에 간 날이었지만 다행히도 아이들의 한국인 통역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었기 때문에 통역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선생님과 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어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신 뒤 아이가 한국에서는 어떠했었는지를 물어보셨다. 나는 아이가 한국에서는 무척이나 모범생이었다고 이야기한 뒤 아직 일본어가 서툴러 나름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어 정말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일본인 특유의 그 공손하고도 또 공손한 표정과 몸짓으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제가 죄송하다며 오히려 본인이 몇 번이고 사과를 하셨다. 


   잘못을 한 건 분명 아이인데 애꿎은 선생님과 내가 서로에게 계속 머리를 조아리며 ‘스미마셍. 스미마셍.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을 반복하고 있던 상당히 오묘한 상황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스미마셍’을 연발하던 중 내가 먼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아마도 그때 나는 조금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 때문에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혼자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해야 했던 바로 그 상황 때문에 말이다. 


   내가 보기에 선생님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친절했다. 아이가 그렇게 심하게 떼를 쓸 때는 한 번쯤은 조금 엄하게 다루셔도 될 텐데 선생님은 매번 아이에게 쩔쩔매시기만 할 뿐 절대 엄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렇다 보니 아이는 본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죄 없는 선생님에게 모두 다 풀어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선생님이 아이에게 한 번쯤은 엄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싶었다. 


   “선생님, 은우가 그렇게 심하게 울면서 떼를 쓸 때는 좀 더 단호하게 대하셔도 괜찮습니다. 집에서도 혼낼 때는 혼내고 엄하게 할 때는 엄하게 하고 있으니까 아이에게 그렇게 너무 잘해주기만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통역 선생님을 통해 내 말을 다 전해 들으신 선생님은 일본어로 한참을 답변을 해주셨고 다시 통역 선생님을 통해 전해 들은 그 답변은 내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선생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어머님,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은우가 그런 행동을 보인 데에는 분명 은우만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이의 이야기를 너무나 들어보고 싶은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그럴 수가 없어서 그게 아이에게 진심으로 미안할 뿐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뿐입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절대 무조건 엄하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일본 사람 특유의 그 공손하고도 또 공손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고 계셨지만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분명 확고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나는 순간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아이가 갑자기 그런 행동을 보이는 데에는 분명 아이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에게는 그 이유가 중요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나에게는 ‘왜’보다는 밖으로 드러나는 ‘무엇’이 중요했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그 행동을 어떤 행동으로 바꾸어 주어야 할지에만 몰두했을 뿐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이다. 선생님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시던 ‘왜’를 나는 아이의 입을 통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아이의 마음에, 아이의 이야기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내가 순간 참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그렇게 심하게 울었는지 뭐가 그렇게 속상했는지 그제야 나는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에게는 아이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마음속에 있던 자기의 이야기를 다 꺼내놓고 나자 아이는 한결 편안해진 듯 보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도 아이는 가끔 유치원에서 울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변함없이 아이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모습만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러다가 아이가 결국엔 선생님을 우습게 보게 될까 봐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었었는데 내가 낳고도 난 참 내 아이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 내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아이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선생님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고 선생님에 대한 신뢰를 쌓아갔다. 선생님이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자신을 아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아이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옳았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의 일본어가 늘면서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단계가 되자 아이는 더 이상 유치원에서 그렇게 심하게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선생님은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훈육도 하시고 엄하게 대해주기도 하셨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깨달았다.


   와세다 유치원은 7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었기에 그 긴 시간을 지켜 온 와세다 유치원만의 확실한 교육철학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런 것을 ‘코다와리’라고 불렀다.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자신만의 고집 혹은 철학 같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나는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곳에서 이러한 일본인 특유의 코다와리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유치원 선생님이 내게 그토록 단호하게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꽤 놀랐었다. 늘 공손하고, 늘 남을 배려하고, 늘 남에게 거절의 말을 하지 못해 항상 빙빙 에둘러 표현하기만 하던 일본 사람들에게 그런 면이 있을 것이라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에게 코다와리란, 특히 자신이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코다와리란 무척이나 소중한 덕목이었다. 늘 웃고 있는 듯 보이지만, 늘 남에게 맞춰주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철학에서만큼은 확고하고도 단호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극히도 세심한 배려심만큼이나 내게는 무척 인상적인 것이었다. 


   한없이 공손하지만 또 동시에 한없이 단호한 모습으로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던 키타하라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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