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ny mini flowers❀ 아홉 번째 이야기
아이들에게 줄 우비를 준비해 두니 거짓말처럼 요 며칠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다행이긴 하지만 좀 어이없다. 그래도 가방에는 늘 우비를 넣어 다녔다. 비가 오는 날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은 계획할 수 없으니 항상 가지고 있어야 했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니 어디를 가든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향하게 되었는데 '비'를 신경 쓰기 시작하니 자꾸 창문 밖을 보게 된다. 일하면서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아! 지금 줘야 하는데!'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며칠을 들고만 다니던 우비 하나를 오늘 드디어 선물했다.
08.08 목요일
퇴근길에 비가 오길래 아이들이 있는 길가에 멈췄다. 가방에 있는 우비는 세 벌이었는데, 아이들은 대충 봐도 열 명은 되어 보였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도로에서 비를 맞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기도 하고 아이들 수만큼 우비가 있지도 않아서 한 두 명 조용히 전달해 줄 수 있는 타이밍을 잡기 위해 어슬렁어슬렁 길가를 맴돌며 아이들을 관찰했다.
사거리에서 이렇게 지낸 지 오래됐는지 신호를 보지도 않고 차가 멈추는 쪽으로 향했다. 이번 신호가 지나고 다음 신호에는 어느 도로에 차가 멈추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미얀마 버스는 늘 만원 버스인데, 그래서 삐죽삐죽 창문 사이로 튀어나온 머리들에게 말을 걸며 구걸하기도 했다. 버스에 가려져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래 공간에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아이들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흥얼거린다기보단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의 놀이 일수도, 여기 본인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럭이나 오토바이 같이(사실 양곤에서 오토바이는 불법이다.) 창문이 없는 차에 탄 사람들은 아이들을 외면하기가 더 어렵다. 바로 코 앞에서 알짱거리며 말을 거니 그걸 어찌 외면하랴. 하지만 그들도 익숙해진 건지 애써 다른 곳을 보거나 저리 가라고 손을 휘휘 젓는다.
어떤 아이들은 먹을 것을 얻었는지 쭈그려 앉아 뭔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그 애들에게 다가갈까 하며 길을 건넜는데, 후루룩 먹어버린 뒤 다시 길 위로 나가버렸다. 길 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가기는 쉽지 않다. 일단 업무 중이기 때문에 방해하기 좀 그렇다. 그리고 혹시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난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무심코 한 행동이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좋지 않아 보일 수 있고 지금 이 나라에서는 뭐든 몰아가면 몰리는 상황이라 조심스럽다.
그렇게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 길거리에 서서 아이들을 지켜봤다. 물도 얻어먹고 과자도 얻어먹고 돈을 받으면 신나 하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줬다. 영락없는 꼬마 애들의 발랄함이었다. 구겨진 페트병 위에 올라타서 슬슬 움직이는 트럭 뒤를 붙잡고 스케이트를 타듯 놀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놀이를 만들고 재미를 찾는구나 싶었다.
사이드미러를 닦을 때에 필요한 준비물이 있다. 칫솔, 세제가 담긴 통과 물이 담긴 통. 그전에는 휴지를 가지고 다녔는데, 요즘 비가 와서 그런지 휴지는 안 가지고 다니는 것 같다.(비닐 안에 있을지도?) 한 아이가 건너편 가게 쪽으로 가는 걸 봤다. 다른 아이들도 건너편으로 가길래 나도 슬쩍 따라갔다. 코로나 이후로 많은 가게들이 입구 앞에 손 씻을 수 있는 세면대를 만들어 두었는데, 한 아이가 거기에서 물을 받고 있었다. 가게 사람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니 익숙한 일인가 보다. 이 때다 싶어서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나를 알아봤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흠뻑 젖어 있는 아이에게 춥지 않으냐 물으니 안 춥단다. 우산 없냐 물으니 없단다. 우비도 없냐 물으니 없단다. 그렇게 몇 마디 나누고 우비를 꺼내 줬다. 비 맞으면 감기 걸리니까 입고 다니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저기에 친구들이 있다고 한다. 아이들은 많은데 내가 가지고 있는 우비는 몇 개 없고, 갑자기 애들 많은 곳에 가서 나눠 주면 눈에 띌 것 같아서 우비가 더 없다고 했다.
아이에게 빛 반사 스티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데, 현지어가 딸려서 잘 설명을 못해줬다. 그냥 이 스티커가 있어서 더 안전할 거라고 더듬더듬 이야기해 주고 보냈다. 내 현지어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돌아서서 걸어가는데 저 멀리 아이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내가 아는 아이들이려나 싶어서 자세히 보며 걸어가는데 아이들이 먼저 내게 인사를 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는 아이들에게 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그 애들은 근처에 집이 있는 것 같았다. 뽀송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 타나카(타나카 나무껍질을 갈아 진흙처럼 만들어 얼굴에 바르는 것)도 방금 바른 것 같았다. 학교에 갔다가 나오는 걸까 싶다. 하교 후 출근하는구나 너희.
근처에 건물에 볼일이 있어서 올라갔는데 아이들이 있는 사거리가 보였다. 잘 쓰고 있나 보니 바로 눈에 띄었다. 아까 만난 아이들도 꽃을 팔고 있었다.
밤에 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났다. 일부러 남편에게 천천히 가라고 하면서 아이들이 있나 봤다. 아이들이 와서 창문을 내렸더니 나를 알아봤다. 차에 있던 간식들을 나눠 주자 아이들이 자기도 우비를 달라고 했다. 우비가 몇 개 있긴 했지만 비가 안 오는데 새 우비를 주면 혹시 팔아버리거나 어른들에게 빼앗길까 봐 나중에 주겠다고 했다. 이게 참 주는 것도 타이밍을 잘 보고 지혜롭게 줘야 한다.
아까 우비를 줬던 아이에게 빛 반사 테이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명을 해줬다. 여전히 버벅거리며 이야기했는데, 아이가 찰떡 같이 알아듣고 "그거 있으면 잘 보여서 더 안전하다는 거죠?"라고 했다. ㅋㅋ 고맙다. 알아들어줘서. 다음에 나눠줄 때는 E와 함께 와서 아이들에게 좀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 쪽 아이들은 앞으로도 책을 읽어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바쁘기도 하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어서다. 대신 이렇게 종종 필요한 것들을 주면 좋겠다 싶다. 아무래도 우비는 비가 안 오면 안 입게 되는데, 그럼 밤에 아이들이 잘 안 보이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니 우비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빛 반사가 되는 것을 주어야겠다. 벨트 같은 것에 테이프를 붙여서 아이들이 착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나 싶다.
그래도 오늘 한 명의 아이에게 우비를 전달해서 기쁘다. 아무래도 내가 계속 가지고 다니며 비 오는 타이밍에 나눠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회사 직원들에게도 우비를 하나씩 나눠 주고 혹시 비 오는 날 비 맞고 있는 거리의 아이들을 만나면 주라고 했다. 어디에 있는 아이들이든 조금은 더 안전하고 비를 덜 맞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