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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Apr 11. 2024

죄송한데, 제가 육아 중이라...

“에디터님, 저번에 이야기 나눴던 카피요. 내일까지 작업 가능하실까요?”

“내일이요? 죄송한데 제가 육아 중이라 저녁부터 작업이 가능해서요…”

“그럼 모레까지 부탁드릴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출산 후 처음 맡게 된 프로젝트는 모 기업의 일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일이었다. 배달의민족이 ‘송파구에서 일 잘하는 방법 11가지’라는 이름으로 만든 일하기 방식 매뉴얼이 화제가 된 이후, 기업들이 자신만의 일하기 방식을 여러 이름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CEO부터 신입사원까지 직원들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 우리 회사에서는 어떤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인지를 위트 있는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 카피라이팅은 처음이었던 터라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취업 준비생 시절, 나는 전공인 국문학을 살리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굶는 과’라는 웃픈 별칭을 갖고 있는 전공이었지만, 나는 우리글을 읽고 들여다보고 쓰는 공부가 좋았다. 카피라이터는 그 시절 내가 꿈꾸던 몇 가지 직업 중 하나였는데, 카피라이터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회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돌고 돌아 어쩌다 사회생활 10년차가 되어서야 해보게 된 일. 본격적인 카피라이팅은 아니었지만, 카피의 세계를 가볍게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신난 마음에 액셀레이터 밟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내가 서 있는 곳이 꽉 막힌 도로라면? 액셀레이터에 발을 올려놓고도 절대 밟을 수 없다. 앞 차가 나아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큰 규모의 기업과 진행하는 프로젝트에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중 누구라도 일정이 생기면 기한은 기약없이 미뤄졌다. 


다음 주 있을 외근을 앞두고 친정엄마에게 본가에서 이틀 일찍 와달라 부탁했다. 엄마는 딸이 일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살던 곳에서의 일을 모두 제쳐놓고 서울로 올라왔다. 한 달 전에 했던 친구들과의 약속도 미뤄두었다. 그런데 외근 이틀 전, 사무실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임원 중 한 분에게 일이 생겨, 당분간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연락이었다. 이미 딸의 집에 온 엄마도, 미뤄둔 약속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렇게 1월 한 달이 하릴없이 지나갔다. 


2월 첫 주,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가 수유실에서 분유를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쓸 수 없는 손 대신 한쪽 고개를 기울여 전화를 받았다. 프로젝트가 재개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틀 후에 임원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그때 논의할 카피가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전화를 건 상대는 지금 메일로 자료를 보낼 테니 내일까지 완성본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죄송한데, 제가 육아 중이라…”

나도 모르게 ‘죄송한데’라는 첫 마디를 내뱉었다. 마감기한은 하루를 더 늘려 이틀이 되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숨이 막혀왔다. 집으로 와 아기와 놀고 아기를 재우는 중에도 나는 아기 옆에 없었다. 몸은 아기 곁에 있었지만 생각은 온통 일을 향해 있었으니까. 


이틀 동안 아기가 잠든 후 후다닥 노트북 앞에 앉아 생각을 짜냈다. 동이 트고 나서 작업을 끝냈다. 완성본을 보내며 메일 말미에 양해를 구했다.                              

대표님, 일정이 변경될 경우 저에게 미리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육아를 하며 작업하다 보니 일정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었을 때 대응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일주일 전에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휴우. 그제서야 숨이 쉬어졌다. 


하지만 이후로도 일정은 정신없이 널을 뛰었다. 아기가 잠든 밤 아홉 시 이후에 본격적인 작업이 가능하다고 일을 맡기 전에 알렸지만, 아기와 함께 있는 오후에 수시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아기를 안고 급하게 자료를 찾거나 메일을 보냈다. 갑자기 미뤄진 일정에 한숨 놓다가도 언제 다시 일이 재개될지 몰라 온전히 쉬기 어려웠다. 미리 잡아둔 온라인 미팅이 당일에 취소되는 일도 잦았다. 그럴 때마다 재차 양해를 구했다. 내가 미팅을 하는 동안 남편이 직장에서 일찍 와 아기를 맡아주고 있다고. 갑자기 미팅이 취소되면 다시 일정을 잡는 일이 쉽지 않다고. 오후 중에는 혼자 아기를 보고 있어 전화나 메시지에 즉각 답변드리기 어렵다고.

 

말하고 나면 마음이 잔뜩 쪼그라들었다. 지극히 사적인 일로 거듭 양해를 구한다는 게 프로답지 않아 보였다. 이것도 힘들다 저것도 안 된다 툴툴대는 사람이 된 기분도 들었다. 일 생각으로 잔뜩 무거워진 표정을 아기에게 들킬까 애쓰고, 퇴근한 남편에게 부랴부랴 아기를 안기고 미팅에 들어가고, 아기를 재운 후 벌개진 얼굴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하루. 매일매일 무리하는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

 

오전의 미팅이 갑자기 취소되고, 연이어 잡은 오후의 미팅에서 상대는 한 시간 넘게 연락이 없었다. 거실에서 아기 우는 소리를 들으며 텅 빈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확신이 들었다. 

‘나한테 아기가 없었더라도 이건 못 하는 일이다.’ 

한참 만에 연락해 온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이번 작업은 끝까지 마무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상대는 이제 일정의 변수가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약속한 프로젝트 종료일인 3월말을 한 달 남짓 남겨둔 시점에도 프로젝트는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방학과는 달리, 남편이 출근하는 개강 후에는 일하고 미팅할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할 수 없었다. ‘역부족’이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이미 시작한 작업까지만 마무리하기로 상대와 이야기를 끝냈다.

 

마침내 작업을 끝내기까지 매일 밤을 시달렸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어려운 일을 피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나의 심판관이 되어 나를 의심했다. 의심의 시간이 끝나면 자책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일을 중간에 그만두었다는 자책. 살면서 그만둔 것들의 목록을 생각하다 아무것도 끝마치지 못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규정지었다.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이제 하고 싶은 일은 영영 못 하게 되는 건가. 아기를 키우면서 일을 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가. 내가 좀 더 부지런해지면, 시간을 잘 쪼개 쓰면 가능할려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가 길어지는 생각이 나를 옥죄고 있을 무렵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에디터님, 연락이 너무 늦었네요. 저희 밥 한번 먹기로 했었잖아요. 그 밥, 언제 먹을 수 있을까요?

이전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던 에디터의 연락이었다. 같이 일했던 수십 명의 에디터 중 유독 그에게 관심이 갔지만, 눈코뜰 새 없는 회사에서 그와 일 이외의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그에게 먼저 연락을 건넨 건 퇴사 이후에서였다. 

“저는 이상하게 자꾸 에디터님한테 내적 친밀감이 들어요. 기회 되면 저희 나중에 밥 한번 먹어요.”


세 계절을 지나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직원과 외주 작업자가 아닌, 선배 프리랜서와 후배 프리랜서로. 아기와 고양이를 함께 키우는 엄마이자 집사로.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비슷한 게 참 많은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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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교수, 나는 반백수> 시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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