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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y 02. 2024

사실은 프리랜서가 아니랍니다


이전 회사 동기의 결혼식. 거의 10년 만에 만난 동기가 얼마 전에 이직했다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건네 받은 명함에는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법한 기업의 이름이 대문짝 만하게 박혀 있었다. 

“나 그 동안 이직 여러 번 했잖아.”

왠지 으쓱해하는 동기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런 명함 하나 있었으면…’ 





내 명함을 처음 받았을 때가 기억난다. 스물여섯, 첫 회사에서 받은 명함에는 큼지막한 회사 로고와 함께 자그마한 글씨로 내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회사 주소와 내선번호, 마지막 줄에 와서야 내 휴대폰번호가 쓰여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

그날의 기분을 한 줄로 설명하면 이러하다.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누군가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소개와 함께 명함을 내밀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에게도, 초등학교 때 글쓰기를 가르쳐주신 선생님께도, 하물며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여행자에게도. 지금 생각하면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꽉꽉 들어찬 명함으로 한껏 통통해져 있던 그 시절의 지갑. 지갑이 홀쭉해질 때마다 회사 서랍에서 명함을 꺼내 채워 넣던 그 시절의 나. 


애지중지하던 명함도 회사가 바뀌면 더는 쓸모가 없어졌다. 마지막 출근날, 짐을 싸면서 명함 케이스에 있던 명함을 회사 쓰레기통에 버렸다. 한 장은 지갑 속에 그대로 넣어두었다.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 후 며칠이 지나면 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새 명함. 명함의 네 귀퉁이를 쓸어도 보고, 왠지 더 부드러워진 것 같은 명함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지갑에 채워 넣었다. 이 명함에서 저 명함으로, 다시 다른 명함으로. 내 지갑은 여러 장의 명함을 맞이하다 텅 비어버렸다. 


다섯 번째 회사를 나온 후, 3년이 지나도록 내게는 새로운 명함이 없다. 명함이 없는 삶. 누구를 만나도 인사치레로 꺼내 보일 것이 없는 삶. 고작 종이 한 장 사라졌을 뿐인데,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많은 걸 설명해야 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는 무얼 할 건지 등등. 내가 누군지를 궁금해하는 상대에겐 그렇게 했지만, 대부분은 “프리랜서예요”, “그냥 이것저것 해요”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아예 침묵하는 경우도 많았다. 


작년 여름, 남편 여동생의 상견례 자리. 회사에 다니며 얼마 전 어려운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예비남편과 1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한 여동생, 대학생을 가르치는 남편, 두 권의 책을 낸 예비남편의 누나와 건축가로 일하는 그의 남편에 관한 질문과 대화가 오갔다. 내 차례에 돌아온 질문은? 곧 태어날 아기 이야기뿐이었다. 


회사를 나온 후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시댁 식구들에게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다. 며느리를 조심스러워하는 식구들도 섣불리 먼저 묻지 않았다. 그러니 나에 관해 나눌 이야기가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공허했다. 그날 저녁, 남산 만한 배를 붙잡고 생각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아무 회사에나 가고 싶다고. 


회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성난 파도처럼 시시때때로 밀려왔다 거품처럼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당장 어디라도 가겠다며 구직사이트를 뒤지다가도 ‘이게 정말 나를 위한 일인가’ 생각하면 바로 멈춰졌다. 나를 밖에 내보이는 잠깐의 시간. 그걸 위해 내 삶을 온전히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 회사라는 공간에서 몸과 마음을 다치며 다져진 깨달음이었다. 


사실, 지금의 내게도 명함이 있긴 하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명함은 필요했다. 거래처 미팅을 하거나 인터뷰를 하고 나서 자료를 요청해야 할 때다. 처음엔 포스트잇에 손글씨로 내 이름과 휴대폰 번호, 메일주소를 차례로 써드리곤 했다. 쓸 때마다 등에서 땀이 삐질 났다. 포스트잇을 건넬 때도 왠지 멋쩍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내 명함을 만들었다. 


명함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포털사이트에 ‘명함’이라고 검색만 하면 명함을 만들어주는 사이트가 수두룩하게 나왔다. 그 중 한 곳을 골라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선택한 후, 그 안에 들어갈 내용을 메일로 보내면 제법 그럴 듯한 명함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명함의 가장 윗줄이었다. 나를 설명하는 한 줄. 회사 이름과 소속팀이 적혀 있던 자리를 나 스스로 생각해 채워야 했다. 나는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 ‘읽다’, ‘쓰다’, ‘만들다’의 세 덩어리로 나눠져 있는 자기소개서를 기억해냈다. (프리랜서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불시에 내야 하는 일이 의외로 많다.) 

읽고 쓰고 만드는 사람 

명함 윗줄을 이렇게 채우고 혼자 으쓱해했다. 읽고 쓰고 만드는 일. 그건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임신과 출산으로 일을 쉬다시피하면서 명함을 잊었다. 내가 쓰던 방을 아기방으로 바꾸며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잊고 지냈던 보라색 명함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부끄럽고 머쓱한 마음이 앞섰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읽고 쓰고 만드는 일과 멀어져 있었다. 누군가 직업을 물어보면 프리랜서라고 대답하면서도 찜찜하다. 드문드문 일하는 내가 스스로를 프리랜서라 칭해도 되는 걸까. 대답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일락님을 부르는 멋진 말을 만들어보면 어때요?”

지난 주 글쓰기 모임에서 일을 고민하는 글을 쓴 후 받은 피드백이었다. 내 일을 부르는 멋진 말. 한 주 내내 고민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을 찾으려면 먼저 나는 무슨 일을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야 할 텐데, 아직 그걸 모르겠다. 모두가 자기 직업의 이름을 단 행성에 살고 있다면,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정류장에 서 있다. ‘정류장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프리랜서라는 단어로 둘러대면서. 


브런치스토리에는 어떤 키워드로 검색해 내 글을 읽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프리랜서라는 단어를 검색해 내 글을 만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얼마 전 알게 되었다. 뜨끔했다. 나는 프리랜서라는 단어를 당당히 내걸 만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미안했다.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일하고 있는 이들이 훨씬 많은데, 고민만 잔뜩 늘어 놓은 듯한 내 글이 그들을 향한 오해를 덧씌울까 봐. 


프리랜서가 될까 고민하는 사람 

이 정도는 어떨까. 회사에 속해 있는 것보다는 회사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일상을 영위하고 싶으니, 이 정도면 딱 알맞을 것 같다. 좀 줄여서 ‘워너비 프리랜서’. 고민하는 시간 동안은 나를 이렇게 부르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아닌 척 살아가지만 사실은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을 것이다. 명함이 없는 그들이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말들이 세상에 많아졌으면 좋겠다. 자리 잡지 못한 사람, 고민 중인 사람, 기다리는 사람도 떳떳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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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교수, 나는 반백수> 시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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