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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y 16. 2023

잘 보일 필요 없단다

사실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저녁을 먹으면서 기분좋게 한잔 한 듯한 목소리였다. 대뜸 남편을 바꿔달라더니 어버이날 내려오는지 묻는다. 그러더니 던진 말.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나한테는 잘 보이려고 애 안 써도 된다.” 

피곤하면 안 내려와도 되고, 아무것도 안 사 와도 된다며 몇 마디를 더 하다 전화를 끊었다. 아빠와 제대로 한 마디도 못 나눈 나는, 나한테 하지도 않은 한 마디에 완전히 꽂혀버렸다. 


자라면서, 커서도 내내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며 살았다.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친구고 가족인 소도시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집 앞 마트에 갈 때는 추리닝 대신 청바지라도 갖춰 입어야 했다. 학창시절의 데이트, 야자시간의 짧은 일탈은 예외없이 부모님에게 보고됐다. 그 시절 내가 동네 사람들보다 잘 보이려 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부모님이었다. 부모님과 나는 서로의 일과가 끝난 밤이면 소파에서 TV를 보며 어색한 안부를 나누는 사이었고, 잠깐의 대화에서 하루의 얼룩과 주름은 깨끗이 펴지고 표백됐다. 학교는 늘 잘 다녀왔고, 급식은 맛있었고, 공부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같이 놀던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한 날도, 학교가 가기 싫어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을 배회한 날도 웃으며 건강하게 곪아갔다. 


잘 보이는 일에 도가 튼 이에게 면접장은 유리한 공간이었다. 낯선 건물에서 낯선 이들에게 평가받는 자리는 오히려 편안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어떤 모습의 내가 될지만 제대로 결정하면 되니까. 머릿속으로 면접관 중 한 명을 점찍는다. 당락을 좌우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 같은 사람으로. 그를 집중적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의 질문 순서가 돌아온다. 질문에는 그 사람의 성격, 관심사, 때로는 두려움이 녹아 있다. 질문을 잘 파악해, 그가 듣고 싶은 답을 들려주면 된다. 이전 회사에서 어떤 ‘활동’을 했냐고 묻는 이에게는 장기자랑부터 동호회까지 막내로서 했던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무용담처럼 들려준다. 우리 회사가 잘될 것 같냐고 묻는 이는 “잘될 것 같으니까 지원했죠”라는 답변에 표정을 풀고 웃는다. 


문제는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다. 면접장 안에서의 ‘나’는 직설적이고 위트 있지만, 현실의 나는 사실 정반대인 것이다. 매일 사무실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점심시간마다 같이 밥을 먹고 회의를 하면서도 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기란 어렵다. 그들은 내 표정에서 또렷한 눈망울보다 흐려진 입꼬리를 더 많이 발견한다. 사소한 일에도 한겨울 나뭇가지처럼 흔들리는 멘탈, 하루에도 몇 번이나 뜀뛰기를 하는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주 화장실로, 휴게실로 숨는다. 숨어서 크게 몇 번 한숨을 쉰다. 그리고 웃으며 사무실로 나온다. 내 입꼬리가 늘 흐린 것은 그래서다. 예전 회사의 대표는 이런 내 표정을 ‘아련하다’는 말로 표현해줬다. “일락씨는 눈치를 엄청 보는데, 눈치가 그렇게 빠르진 않아.” 전 회사 선배의 뼈 있는 농담이다. 남들에게 더는 잘 보이기를 포기한 듯 보이는 순간에도 사실 나는 변함없이 애쓰고 있었다. 


회사에는 나처럼 잘 보이려 자기를 꽁꽁 숨기는 부류 외에, 자기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멋쩍게 웃으며 뒤가 찜찜한 합의안을 도출하기보다는 내면의 가시를 힘껏 내보이며 속시원한 해결책을 낼 줄 알았았다. 회사생활을 하는 내내 그들과 나의 차이가 뭘까 고민했다. 생각지도 않은 옷차림에서 답을 얻었는데, 늘 흠없이 입고 회사에 오는 나와 달리 그들의 차림새는 어딘가 느슨해 보였다. 사회생활이 교복이라면 난 그 옷을 매일 다려 입고 출근하는 사람 같았다. 사실은 안 보이는 허리 지퍼, 셔츠 단추 한두 개 쯤은 툭툭 풀어도 지장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유로운 그들은 이직을 했고, 갑갑했던 나는 회사를 아주 나왔다. 


네가 어떤 말을 하고,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네가 좋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잘 보일 필요 없다고 누군가 말해줬더라면 나는 좀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으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됐을까. 잘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유지되는 관계란 서로를 얼마나 좋아해야만 성립되는 걸까. 아무 힘들이지 않고 숨 쉬듯 말하고 행동해도 언제까지나 너를 좋아할 거라는 고백. 그런 고백을 들은, 내가 아닌 옆사람이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얄밉고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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