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걷고 TV를 켠다. 뉴스에는 오늘 하루 있었던 사건사고가 줄지어 방송된다. 트럭이 전복되고, 동네 전체에 수돗물이 끊기고, 길을 건너다 누군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 멍하니 모니터를 보면서 빨래를 갠다.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듣듯이 내 세상의 불운 이야기를 듣는다.
불운은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세상의 비극은 모니터 속에만 전시될 뿐, 내게는 닿지 않을 거라 믿었다. 오랫 동안 가족이 되기를 꿈꿨던 내 고양이가 데려온 지 일주일 만에 병으로 죽어갈 때, 설탕물도 입에 대지 못하는 500그램의 생명이 이동장 안에서 숨을 몰아 쉬는 걸 지켜볼 때, 마음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를 동물병원 검사실에 맡기고 나와 수의사의 선고를 기다리던 그날, 알았다. 나는 특별히 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우연히 불운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뿐임을. 어떤 불운은 나를 피해 가지 않을 수 있음을.
고양이는 범백혈구감소증을 진단받았다. 치사율이 90프로에 육박한다고 했다. 아이를 냉장고만 한 격리병동에 입원시키고, 매일 아침 출근 전에 아이를 보러 갔다. 3일차, 먹지 않던 아이가 먹었고 눈물 방울만큼 작은 똥을 싸놓았다. 7일차, 전염병과 싸워 이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90프로의 불운 대신 10프로의 행운이 내게 왔다. 이또한 내가 특별히 잘나거나 운이 좋아서는 아니다. 갑자기 닥쳤던 불운처럼, 급작스러운 행운을 맞이한 것뿐이었다.
행운과 마찬가지로 불운도 비처럼 떨어진다. 내리는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기 몸보다 한참 큰 우산이 있다고 해도 쏟아 붓는 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별 문제없이 살아가던 도중,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불운 앞에 멈춰 선다. 뜻밖의 행운을 맞을 때 그랬듯, 불운을 맞는다.
가끔은 아주 흠뻑 맞아서 불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다는 착각이 든다. 돌봄센터에 갔던 날 밤, 태어난 지 9개월된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며 잠에서 깨더니 잠들지 못한다. 자야지 자야지, 달래다 포기하고는 방의 불을 다 켜고 아기와 논다. 다음 날 아침, 아기의 몸이 불덩이다. 몸에는 전에 없던 빨간 반점이 돋아 있다. 때마침 딸의 집에 들른 엄마가 집에 쌓여 있는 감자로 샌드위치를 해주겠다고 한다. 아기가 해열제를 먹고 잠든 사이, 샌드위치를 먹으려다 식빵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오늘은 일요일. 아파트 단지 안의 마트는 문을 걸어 잠갔고, 급히 뛰어간 편의점에도 식빵은 없다. 냉동실을 뒤지다 언젠가 넣어둔 크루아상 생지를 발견한다.
포장지에는 네 시간을 해동해야 한다고 적혀 있지만, 아픈 아기를 돌보며 네 시간을 기다렸다 밥을 먹는 건 불가능하다. 빵을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돌린다. 씹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진 빵. 급하게 먹고 배를 채우기로 한다. 식탁 맞은편에서 남편이 비명을 지른다. 먹기 좋은 크기로 빵을 자르려다 손을 베었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밴드를 붙이라 말하는데, 움켜진 손 아래로 빨간 피가 뚝뚝 떨어진다. 40년간 주부로 살며 칼에 베인 상처에는 박사가 된 엄마가 능숙하게 사위의 상처를 지혈한다. 10분, 20분 그리고 한 시간.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는 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감지한 엄마가 응급실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수건으로 손을 감싼 남편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밤의 택시 안,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넓은 대학병원 안에서 응급실은 보이지 않고, 겨우 도착한 응급실 의사는 중증이 아니니 2차병원으로 가라고 한다. 다시 택시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가는 길, 더 세차게 쏟아 붓는 비. 일요일 밤의 응급실은 환자들로 넘쳐난다. 남편을 진료실로 보내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이에도 속속 도착하는 들것. 들것에 실린 환자를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린다. 대기실의 액자에는 성경의 한 구절이 쓰여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종교가 없어도 절로 경건해지는 마음. 소란을 피해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눈을 뜨자 멀리 보이는 베드 근처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모여 있다. 봉합수술을 하는 듯 보인다. 베드 밑에 있는 익숙한 슬리퍼. 남편의 슬리퍼다. 집에 있는 아기는 괜찮을까 궁금해져 거실에 설치해 둔 홈캠을 켰는데, 엄마가 우는 아기를 업고 거실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 전화를 하니 더 크게 들리는 울음소리. 울음소리에 아기가 자던 방으로 달려가 아기를 안아든 순간, 아기가 분수처럼 토를 뿜어냈다고 했다. 토를 뒤집어 쓴 엄마는 옷을 갈아 입을 새도 없이 우는 아기를 들쳐 업고 거실을 돌고 있다고. 마음이 바빠진다.
봉합수술을 마친 남편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 세 번째 타는 택시에서는 심한 악취가 난다.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숨을 몰아 쉰다. 숨을 들이쉬자마자 폐에 가득 차오르는 악취. 악취를 맡지 않으려 얼굴이 벌개지도록 숨을 참는다. 숨을 참으며 바라보는 창밖의 비. 집에 도착하자, 아기는 잠이 들었다. 엄마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침대시트를 세탁한다. 긴 밤.
다음 날 새벽엔 잠을 깨려고 콜드브루 커피를 타다가 보통 타는 양의 다섯 배를 넣어버렸다. 머리가 핑 돌더니 몸의 감각이 죄다 사라진 듯 얼얼하다. 카페인은 약으로도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운동을 해서 땀을 빼거나 물을 많이 마셔서 소변으로 배출해야 한다고. 붕대를 한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아파트 단지 주위를 달리는데 웃음이 났다.
“나는 이상하게 지금이 편해.”
“그게 무슨 말이야?”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남편이 고개를 든다.
“좋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때는 뭔가 부담스러워. 왠지 더 행복해해야 할 것 같고, 더 누려야 할 것 같아서. 그런데 힘든 일만 있을 때는 그냥 내가 기특해. 이걸 견뎌내고 있는 것도 대단한 것 같고, 가끔 웃음이 날 때는 내가 자랑스러울 때도 있다니까.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잖아.”
“모르겠고, 난 그냥 행복이 좋아.”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투정을 단칼에 잘라버린다.
“나는 말이야. 노력하면 불운을 피할 수 있다는 게 착각 같아. 다들 불운을 피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를 탓하게 되잖아? 이때는 이렇게 할걸, 이건 하지 말걸, 그러면서. 근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야 돼. 아무것도 안 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이번엔 또 뭐라도 해볼 걸, 그러면서 자책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도 노력하면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는 건 막을 수 있겠지.”
“아프고 다치고 죽는 일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데?”
노력하겠다는 남편도 말이 없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손톱 거스러미처럼 거슬리는 몇 가지 불운이 우리를 지나갔다. 아기의 열은 내렸고, 왼손을 다친 남편은 오른손으로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했다. 『무탈한 오늘』.
고양이가 죽을 고비를 넘겼던 해에 산 책의 제목이었다. 끝까지 읽진 못했다. 그래도 틈틈이 책꽂이에 꽂아놓고 초록색 글씨로 쓰인 제목을 바라봤다. 불운이 한 차례 그치고 나서 다시 본 제목은 경이롭게 느껴졌다. 모든 불운이 비껴간 하루. 내리는 빗줄기를 하나도 맞지 않은 날처럼 기적 같은 그 하루가 그저 무탈한 오늘로, 때론 평범한 오늘로 불릴 만큼 많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아기의 낮잠을 틈타 안방에서 노트북을 두드린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모든 불운과 행운이 잠든 시간에 나는 쓰고 있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무것도 맞지 않은 몸으로 크게 한 번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