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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Dec 06. 2022

나는 왜 하소연을 참지 못하는가

"잘 지내요?" 

오랜만에 연락해 온 상대가 으레 건네는 인사에도 알맞은 답을 고르지 못한다. “뭐, 그럭저럭이죠” 정도의 대답은 양반이다. 내적 친밀감이 웬만큼 쌓였다고 생각한 상대에겐  “저 때문에 죽겠어요”로 시작해서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금쪽상담소>라는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얼마 전에 배우 신소율의 이야기를 듣고 흠칫 놀랐다. 세상에,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헤어질 때 인사치레로 하는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저는 절대 못 꺼내요. 상대가 그런 말을 하면 언제 밥을 먹을지 한참 생각하고요.” 

오은영 박사님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유연성이 조금 부족하다고 진단해주셨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사회적 언어가 있고, 사회적 언어는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사회생활이라면 나도 10년 가까이 했다. 그래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중 가장 나쁜 버릇이 바로 하소연이다. 친한 친구가 직장 동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서부터 계속 메신저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해서 힘에 부친다고.

“근데…있잖아. 혹시 나도 힘들어?” 

“언니는 괜찮지. 언니는 그냥 회사 동료가 아니라 친구잖아. 뭐든 이야기해줘.” 

고마워 친구야. 나도 밖에선 안 그럴게. 다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섯 곳의 회사를 거치는 동안, 상사의 신임은 받지 못했지만 마음을 나누는 회사친들이 생겼다. 퇴사를 하고도 자주 만나고, 오히려 더 친해지기도 했다. 친해진 계기는 8할 이상이 하소연이다. 휴게실에서 한숨을 푹푹 쉬다가, 퇴근하고 맥주 한잔하다가, 메신저로 화풀이하다가 가까워졌다. 


아무한테나 하소연을 늘어놓진 않는다. 그 전에 충분히 간을 본다. 어퍼컷을 날리기 전에 잔잔바리로 잽을 날리는 복서처럼, 한 마디씩 두 마디씩 건네면서 내가 나눈 하소연에 하소연으로 화답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몇 번이고 잰다.

잘못 쟀을 때는? 내가 건넨 하소연의 몇 배나 되는 팩폭을 얻어 맞는다. 딱 한 번, 가깝다고 생각했던 동료에게 제대로 가시 돋힌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은 때리는 말보다는 도려내는 말에 가까웠다. 그날 이후, 동료와는 일 얘기 이외의 말을 나눈 적이 없다. 늘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싶었던 그가 숙고 후에 건넨 말이었다는 걸 퇴사 후에야 알았다. 상대의 진심을 맘대로 재단해버린 게 미안했다. 


나는 왜 하소연을 참지 못하는가. 

불안해서 그렇다. 내 나름 노력하고 있는데도 매일 내는 결과물이 발톱 때만큼도 만족스럽지 않아서, 언제까지 이 모양일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연차가 쌓일수록 일은 쉬워지지 않고 도리어 어려워만져서. 

칭찬을 받고 싶진 않다. 칭찬받으면 의심부터 하는 성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냥 빈말 아닐까?’, ‘저 사람, 내 글을 읽어보긴 하고 칭찬하는 건가?’ 생각하면서 어색한 웃음으로 일관한다.

 

“너 지금 괜찮아.” 

그저 이 한 마디를 듣고 싶다. 잘했다, 못했다는 말보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말. 물 밖에 나온 고기처럼 날뛰지만, 결국은 고요해지고 싶은 것이다. 

잘하고 있고 잘할 거라는 확신. 그것이 내 내면으로부터 온다면 참 좋을 텐데, 자주 바랐지만 습자지처럼 얇고 투명한 나의 내부는 당장 오늘을 버텨내기도 버거웠다. 그래서 카톡창이 바쁘다. 어떤 날은 자고 일어나면 카톡이 수십 개씩 와 있다. 당장 그만두고 싶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는 카톡이지만 한 마디면 이내 잠잠해진다. 


“괜찮아질 거야.” 

몸에 잘 드는 약을 처방해주는 의사처럼 습자지들은 서로에게 ‘괜찮음’을 처방한다. 사실은 자신조차도 하나도 괜찮지 않지만, 타인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다독인다. 원인도 해결책도 모르는 마음은 그렇게 간신히 안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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