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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일락 May 23. 2024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도
가끔은 바보처럼 웃는다


“원래 성격이 좀 부정적인 편인가요?”

“네?”

“검사지에 그렇다고 나와서요.”

“아,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5년 전, 한 회사 면접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법 큰 출판사였던 그곳의 채용 전형에는 희한하게도 인적성검사가 있었다. 온갖 액체의 농도와 물체의 속도를 구하라고 하는가 하면, 상자를 이리저리 펼쳐놓고 별 모양이 그려진 면이 어디인지를 묻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대학 졸업반 시절에 대기업 입사 전형 중 이런 문제를 푸는 과정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내가 이런 문제를 마주하다니. 그것도 출판사 경력직 편집자로 지원한 회사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연신 지우개질을 해가며 문제를 풀었다. 


시험시간이 끝나고, 이어지는 시험에서는 여러 문장에 응답해야 했다. 죽고 싶은 생각을 자주 한다든가, 가끔 미쳐버릴 것 같다는 문장에 ‘아주 그렇다’에서 ‘전혀 아니다’까지 정도별로 나뉜 다섯 가지 응답을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체크하는 시간이었다. 언젠가 이런 검사를 할 때 너무 바람직한 응답만 하면 거짓말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제법 솔직하게 아주 가끔 죽고 싶은 생각을 하며, 그것보다는 더 자주 미쳐버릴 것 같다고 체크했다.


그래서였을까. 면접장에서 냉큼 면접관이 성격이 부정적이냐고 물어 왔다. 면접관에겐 심리검사지처럼 거짓을 판별하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진 않겠지만, 그보다 속일 수 없는 게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 눈 앞에 있는 지원자의 속을 꿰뚫어보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을 속이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이런 말도 덧붙였다.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살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자주 하게 됩니다.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책을 자주 찾게 되었고, 책을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책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기억 나진 않지만, 대략 이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순간 나도 면접관을 읽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 뭔가 들킨 표정이 스쳤던 것이다. 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그도 나와 비슷한 부류였음이 틀림 없다. 그저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임원이니 나처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가장 내밀한 부분을 들키는 검사 따윈 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래서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처럼 꽁꽁 잘 숨겨 왔다. 이 회사의 지원자로 그 앞에 서기 전까지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만난 동족에게 반가움의 눈인사를 보냈다. 


그는 나의 눈인사가 반갑지 않았나 보다. 사실은 눈인사보다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있었겠지. 그날 있었던 최종면접에서 나는 탈락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문자메시지를 받은 건 다른 회사의 면접을 보러 가던 길에서였다. 그날 면접 본 회사에 합격해 2년 정도 다녔다. 그 회사의 면접장에서 팀장이 건넨 첫마디는 “성격이 부정적인 편인가요”가 아니라 이것이었다.  


“배고프죠?”

마지막 면접자였던 내게 그는 이 질문과 함께 비스킷을 건넸다. 그의 첫마디가 좋았다. 일을 하면서 그와 나는 육지거북과 바다거북처럼 전혀 다른 종족임을 매 순간 깨달았지만, 그가 너무 미울 때도 있었지만, 회사를 나온 지금도 결코 그가 싫진 않다. 그는 나를 꿰뚫어보는 대신 챙겨준 사람이니까. 


그런 그조차도 나와 일하면서 어쩌면 알았을지 모르겠다. 세상 좋은 사람인 양 희미한 미소를 띤 내 안에 사실은 불평불만밖에 모르는 까탈쟁이가 한 명 살고 있다는 걸. 그의 말에 “오, 좋은데요?” 하고 대답하면서도 사실은 아닐 때가 많았다는 걸. 


일을 할 때 나는 엄격하다. 진심으로 좋다, 잘했다고 느끼는 때가 많지 않다. 사실, 내가 제일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상대는 바로 나다. 나는 나에게, 내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한다. 만족하지 못할까 봐 차일피일 미루고, 미루다 후다닥 해치우고, 해치우고 나서는 예상했던 대로 만족하지 못한다. 일하는 시간 중 대부분을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보낸다. 


“다행이네요.”

같이 일하는 누군가가 칭찬해주면 이렇게 대답한다. 이 대답이 이상하다는 걸 알려준 건 전전 회사 팀장이었다. 

“저도 팀장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칭찬하는 게 낯설거든요. 뭐라고 말을 꺼낼까 엄청 고민하다가 말하는데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나는 왜 매번 다행이라고 할까. 다행이라는 말 앞에는 사실 ‘들키지 않아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나는 스스로를 결점투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인데, 그걸 상대가 몰라봐서 일단은 다행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불만이고, 자존감도 바닥이고, 하나를 봐도 마음에 안 드는 점 열 가지가 한꺼번에 떠오른다. 그렇게 살면 세상 사는 게 너무 힘들지 않냐고? 힘들다. 그래서 한때는 ‘긍정의 한 줄’류의 책을 읽으며 내 안의 실오라기 같은 긍정의 힘을 끌어내려 애써봤다. 회사 화장실에 숨어 ‘개구리 뒷다리’를 발음하며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도 봤다. 그러다 얼마 못 가 포기하고는 생긴대로 그냥 살았다.


그냥 살다가 얼마 전, 알게 됐다. 『모든 삶은, 작고 크다』 는 책 제목을 읽고 나서였다. 세상엔 마냥 좋은 것도 없지만, 마냥 나쁜 것도 없다. 긍정적인 성격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듯, 부정적인 성격 역시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도끼눈을 뜨고 투정하는 데 익숙한 내게도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온다. 너무 맛있는 것, 너무 좋은 영화, 인생책, 너무 좋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세상에 다시 없을 기쁨을 경험한다. 있는지도 몰랐던 내 안의 어떤 부분이 부르르. 가늘게 떨린다. 


인생에서 경험하는 기쁨의 총량이 사람마다 비슷하다면, 소소한 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자주 찾아오는 기쁨과 어쩌다 한 번 내게 오는 기쁨은 덩치 자체가 다를 것이다. 내 기쁨은 흡사 디즈니 캐릭터 '빅 히어로'를 닮았다. 얼마나 몸집이 크냐면 가끔은 강펀치를 맞은 듯 몸이 휘청하기도 한다. 그런 기쁨은 몸 안에 새겨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순간을 생생히 다시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어느 기쁨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다시 오기 어려운 귀중한 기쁨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방에는 네 칸짜리 책꽂이가 있다. 평생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을 꽂아두는 공간인데, 거기에 꽂힌 책을 읽는 일은 거의 없다. 키를 맞춰 가지런히 꽂아두고 흐뭇하게 바라본다. 꽂아둔 모양이 흐트러질까 봐 웬만해서는 꺼내지 않는다. 가끔 위에 쌓인 먼지만 쓸어준다. 사람도, 기억도 진짜 좋아하는 건 그렇게 아낀다. 


일을 할 때도 내 안에 탈곡기가 있는 것마냥 한다. 이제껏 해 온 일을 내 안에 탈곡기에 탈탈 털어, 좋았던 일만 남긴다. 그렇게 털고 또 털어 여기, 내 방 책상 앞까지 왔다. 이 책상에서 나는 글쓰기 모임에 가져갈 글도 쓰고, 책 교정도 보고, 기사도 쓴다. 매번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채로 책상 앞에 앉지만, 책상에서는 그래도 웃는 일이 꽤 있다. 글쓰다가 웃겨서 큭큭. 기사 자료조사를 하다가 신기한 걸 발견하고는 헤벌레 입 벌리고 웃는다. 회사였다면 옆자리 동료가 보고 ‘오늘 어디 아픈가’ 했겠지만, 아픈 게 아니라 원래 좀 이상하다는 걸 아는 남편이 옆자리 동료라서 마음껏 이상하게 웃는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다 병아리 눈물 만큼의 긍정을 맛볼 수 있는 한 뼘짜리 공간에 바보가 되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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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교수, 나는 반백수> 시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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