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부터 출산까지 (2016.09.10. 작성)
나는 20대 초반에 독립했다. 아르바이트해서 조금씩 모았던 돈으로 학교 앞 작은 옥탑방에서 시작한 자취. 부모님이 마련해준 자금으로 시작하는 혼자만의 생활은, 자취도 독립도 아니다.
그 후, 창문 없는 고시원에서 작은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옮겼을 때,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의 감격. 그때부터 안 해본 일 없이 바쁘게 지내며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때의 내가 대단.......하긴 개뿔. 짠할 뿐이다. 가끔 나의 경험을 치켜세워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경험을 할 필요가 없었던 그들이 항상 부러웠다.
너무 힘들었던 어느 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생 계획 7가지’를 알록달록 써 내려갔었다. 30대 초반에 어느 정도 이뤘는지 봤더니 6가지를 이뤘더라. 그 안에 없었던 결혼. 그것을 하게 되었다.
특별히 독신주의자였던 것도 아니고, 남자를 싫어했던 것도 아니다. 단지 일반적(이라 여겨지는)인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었다. 결혼하자고 해서 헤어진 연인이 있었을 정도로, 결혼이란 건 둘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지인들이 많이 놀랐다. 그리고 축하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했다.
나와 5년 정도 누나 동생 사이로 지낸 그는, 착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연상연하 커플의 시작이 거의 그렇듯, 동생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고백했을 때마다 거절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잊을만하면 다시 사귀자고 했다. 아무리 밀어내도 반복하는 그의 고백이 일상이 되었을 무렵, 우리는 결국 사귀는 사이가 됐다.
하지만 사귀는 중에도 그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몇 년 후, 여행지에서 생각지 못한 프러포즈를 받고 나서 처음으로 결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10여 년을 혼자 살아왔는데 누군가와 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엄마의 역할을 잘 모르는데 괜찮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할 말 다 하는 성격인데 시부모님과 괜찮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서운하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내 덕분에 좋은 방향으로 많이 바뀔 수 있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그이기에, 노인이 되어도 서로 존중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부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정말 힘들 때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그와 결혼하기로 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가 부족한 것은 없었다. 그 많던 학자금 대출도 다 갚았고, 안정적인 직업도 가지고 있었으며 인기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 없었던 것 한 가지가 너무나 컸다. 그것은 바로 부모의 빈자리였다.
결혼 당사자보다 부모가 중요시되는 우리나라 결혼 문화에서, 그가 자신의 부모에게 내 사정을 전할 때, 아마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겪어낸 그가 참 고마웠고, 나를 좋게 봐주신 시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결혼식 6개월 전부터 매달 일정 금액을 모아,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결혼을 준비했다. 집은 전세자금 대출로 마련했으며, 침대 등 둘이 써야 할 것 제외한 대부분의 살림살이는 내 자취용품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라지도 않았던 친척 어른들이 도움을 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딱히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 없어서 최소한으로 준비했지만 꼭 하고 싶었던 것은 있었다. 하나는 신랑 신부 중에서 한쪽만 알고 있는 주례보다는 신랑 신부 지인의 축사 시간을 넣는 것, 다른 하나는 신랑 신부의 축가와 신랑 신부를 모두 아는 사람의 축가를 넣는 것이었다. 축가는 예정대로 진행했지만, 시부모님께서 주례를 부탁하고 싶어 하신 분이 계셔서 축사는 진행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로 예전부터 부탁드렸던 선배님도 계셨기 때문에 그분께 너무 죄송했다.
결혼식은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에 웨딩플래너를 너무 대충 결정한 잘못이 컸다. 메이크업과 헤어도, 사진과 동영상 촬영도, 모두 엉망이었다. 그래도 시간을 내서 축하하러 와주신 많은 분 덕분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행복한 날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우리는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대학 때부터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길게 여행을 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가고 싶었던 유럽. 특별한 것을 하지 않더라도 그 공간에 있었던 시간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언젠가 꼭 다시 가고 싶다.
그리고 결혼과 관련해서 아직도 진행 중인 일이 있다. 바로 예식장 민사 소송이다. 소비자원에서도 우리 입장에 손들어줬기 때문에 민사까지 갈 일은 아니었는데, 예식장의 억지 주장이 계속되어 민사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나나 남편이나 건들지 않으면 참 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귀찮아도 진행하고 있다. 이 일은 사건이 완료되면 별도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한 우리의 결혼 생활. 우리의 첫 신혼집은 높디높은 언덕 위의 작은 집이었다. 많이 웃기도 했고 많이 싸우기도 했던 그곳에서,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에게 아가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