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상자 Nov 01. 2020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나

부모덕 보는 사람이 부러웠다. 아니, 덕을 보진 못해도 그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부러웠다. 과거형으로 썼지만 지금도 그렇다. 혼자서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도 잠시, 부모의 지원을 받아 이미 이뤄낸 사람을 보면 허무함이 밀려오곤 하니까.  아가에게 줄 것이 너무 없어서 결혼이란 걸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 부러움은 미안함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 공업고등학교


중학교 3학년 때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다. 초등학교 실과 시간에 요리 실습보다는 뭔가를 만드는 게 더 재미있었고, 가정 교과목에 있는 내용보다는, 기술 교과목에 있는 내용에 더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문계로 가라는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과 이야기해봤냐고 물어서, 특별히 반대하시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쓸데없이 자립심과 독립심이 커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란 생각도 있었고, 아빠는 내 결정을 존중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는 달랐다. 내가 관심 있어서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집 사정이 안 좋아서 바로 취업할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빠에게 말했다. 그럼 상업고등학교나 실업고등학교도 있는데 왜 공업고등학교를 가고 싶겠냐고. 그런 분야에 관심 있다고. 그렇지만 아빠는 내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 않고, 속 깊은 딸이 아빠 생각해주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경제적인 부분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공업고등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졸업하면 관련 전문대학을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빠의 눈물을 보고 마음 약해진 나는, 인문계로 지원했다.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 가장 부러운 건, 재수생


집에 수험생이 있으면 그 사람 중심으로 가족 일이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다. 수능을 보기 위해 내가 살 수 있던 것은 과목별 총정리 문제집이 전부였다. 한 과목의 문제집을 몇 권씩 풀어봐야 한다는데, 그러기는 커녕, 모든 과목을 살 수도 없었다. 머리는 좋지 않으면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은 왜 그리 많은 건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수학 점수가 엉망진창인 건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 문과이고 수학을 전혀 공부할 생각이 없는데 대학 입시에선 수학 점수가 너무 중요한 아이러니. 


내가 수능을 볼 때는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 과목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여러 과목을 개설하기 어려우니 '경제' 과목을 선택하라고 했지만, 나는 '세계사'를 선택하고 혼자 공부했다. 그리고 수능에서 그 과목은 만점을 받았다.  


아무튼, 상향 지원한 곳은 떨어지고 하향 지원했던 두 곳이 붙었다. 완전 하향 지원이었던 곳은 4년 장학금이었는데, 가지 않았다. 아빠는 내심 그곳으로 가길 바랐지만, 그냥 내 고집대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랬다. 


재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딘가에 박혀서 공부만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돈을 벌어야 하니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다행인 건, 대학 생활을 하면서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거다. 운 좋게도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감사한 일이다. 

 


| 어학연수


어학연수 한 번 가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돈도 돈이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강한 척해도 엄청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그렇다. 어차피 자취하는 거, 외국에 나가볼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그 시절도 돌아가도 어차피 같은 결정을 하겠지만, 아쉽고 아쉽다.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나서 유학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완전한 이민이 아니라면 내 짐을 어디 맡길 수도 없으니, 방법을 생각할 수 없더라. 자취생이 어딘가에 짐을 맡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저런 고민하지 않고 떠날 수 있는 배짱. 그런 게 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IMF 수습하느라 온 나라가 정신없던 때라서 해외 교류 프로그램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갈 사람은 갔는 걸. 그래도 아빠한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아빠의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그 소리를 들으면 더 속상할 것 같아서.



| 예술 분야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고, 어릴 때부터 소질 있다는 소리를 들은 편이다. 그런데 뭔가를 집중해서 할 수는 없었다. 어학연수와 마찬가지로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나서 생각을 해봤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뭘까. 하고 싶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뭘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공통적인 것은 예술 분야라는 것이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비용을 지출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곡도 해보고, 녹음도 해보고, 공연도 해보고, 캘리그래피도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디자인도 해보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한 편,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도 컸다. 그래도 해본 것에 감사한다. 


하고 싶은 게 많아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인생. 그저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이전 09화 애주가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