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술을 좋아했다. 아빠의 영향인지 나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 아빠의 술, 빨간 뚜껑이 덮인 하늘색 병에 담긴 진로 소주
아빠가 식사할 때면, 빨간 뚜껑에 하늘색 병에 담긴 진로 소주와 그것을 따라 마시던 큰 잔을 꼭 놨다. 빨간 뚜껑의 소주가 아니면 너무 순해서 술이 아니라 물 같다던 아빠였다. 그리고 아빠의 상에는 맵고 짠 것을 못 먹는 나를 배려한, 고춧가루와 소금도 항상 있었다.
한동안 순한 소주가 유행하면서 하늘색 병은 초록색으로 변했고, 아빠가 좋아하던 소주는 없어졌다. 최근 트렌드의 중심에 레트로가 자리 잡으면서, 예전 하늘색 병 소주가 나왔는데 그걸 보니 찡했다. 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랬나 보다.
| 포장마차에서도 함께
아빠와 가끔 가던 동네 포장마차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단골이 됐을 때, 주인아저씨는 자신의 딸은 밥도 같이 안 먹으려 한다며 너무 부러워했다. 아빠 친구들이 부러워해서 행복하다는 이야기만 전해 듣다가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아빠는 한잔하자고 할 때면 꼭 그 포장마차에 가자고 했다. 아무래도 부럽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도 아빠는 역시, 빨간 뚜껑이 덮인 하늘색 병에 든 진로 소주를 마셨다.
우리가 가면 항상 딸 이야기를 하셨던 그분. 그분의 딸도 아빠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냉면과도 함께
아빠와 함께 자주 먹던 음식 중의 하나는, 함흥냉면이다. 나는 물냉면, 아빠는 회냉면. 그때도 역시, 빨간 뚜껑이 덮인 하늘색 병에 든 진로 소주가 함께했다.
내 식성이 좀 특이한 편인데(특이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0.1%만 해당되는 특이 식성'이라는 글을 보고 특이하다는 것을 알았다.) 소스나 간을 잘하지 않는다. 콩국수도 그냥 먹고, 비빔밥의 장을 덜어내고 비벼 먹지 않으며, 국이나 탕에 밥을 말아먹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물냉면에도 식초와 겨자소스를 넣지 않는다. 아빠는 가끔 무슨 맛으로 먹냐며 내 냉면에 식초와 겨자소스를 넣어버리곤 했다. 음식을 버릴 수 없으니 먹긴 했지만, 아빠는 한동안 나를 달래야 했다. 그런데 아빠는 또 그랬다.
지금도 여전히 소스나 간을 하지 않지만, 냉면 먹을 때는 식초와 겨자소스를 조금 넣는다. 그러면 아빠랑 먹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