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대는 정말 바빴다. 대학생활에 아르바이트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살았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과 공부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그 시절을 그렇게만 보낸다는 게 아쉬워서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연애도 했다. 하지만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은 20대 청춘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버텨낸 것뿐이었다. 알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고, 내 앞날이 너무 깜깜해서 혼자 많이도 울었다.
내가 그렇게 나만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살고 있을 때, 아빠의 몸에는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고,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암세포가 그렇게 자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집안 상황이 너무 안 좋았을 때여서 제대로 된 검사도 받지 못하고 그저 참았을 아빠. 그래서 조기에 암을 발견하지 못해 치료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나는 등록금이 부족해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만 하던 중이었다. 대학 휴학이 아니라 자퇴를 고려했을 정도로 돈이 없었다. 가끔 생각한다. '아빠의 암이 5년 후에만 발견되었다면, 치료해드렸을 텐데.'라는 부질없는 생각 말이다. 아니, 정기적인 건강 검진으로 암이 생기지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서 지인 부모의 건강검진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건강검진을 해서 아픈 부분을 발견하게 됐다거나, 생신 선물로 건강검진을 시켜드렸다는 등의 이야기. 그저 부럽고,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진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서.
| 아빠와의 마지막 날
아빠의 기일이 속한 달이 되면, 마음이 무겁고 싱숭생숭하다. 가끔 선을 넘는 남편도 그 시기에는 나를 건들지 않는다. 많이 바쁠 때면, 여러 일을 동시에 하기도 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그러지 못한다. 이제 좀 시간이 지나서인지 기일 앞뒤 두 달 정도 그렇다. 속이 불편하다며 아파했던 아빠도 생각나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억울해하던 나도 생각난다. 아파하며 말라가는 아빠 모습이 보기 싫어서, 미안해하는 아빠가 보기 싫어서, 병원 주변을 서성이던 적도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웃고 떠들며 밤새 술 마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의 암은, 나 고생하지 말라고 전혀 손쓸 수 없는 말기에 발견된 건가 싶기도 하다.
어느 날, 아빠의 동생들(고모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때 복숭아를 사서 오셨는데, 그동안 어떤 것도 제대로 못 드시던 아빠가 너무 맛있게 드셨다. 호전되는지 알고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맛있게 드신 건 그 복숭아가 마지막이었고, 이후 아빠의 상태는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결국, 병실을 옮기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료진의 말을 들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아빠가, 한순간 정신이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빠 옆에 혼자 있던 내게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딸내미, 다른 집에서 태어났으면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아빠가 미안해."
| 아빠의 장례식
"아버지 병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네가 잘못한 거야."
아빠의 장례식 때 나이 차 많이 나는 사촌이 내게 한 말이다. 나는 그때까지 친척 앞에서 의견을 제시하거나 큰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면서 소리 질렀다. 돈 버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데 어떻게 발견하냐고. 네가 그렇게 돈 벌어봤냐고. 딱히 그 사람에게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동안 내게 그렇게 말하던 모든 사람에게 했던 거다. 그 당시 사람들이 날 어떻게 봤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고 상관하지도 않는다. 너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을 뿐.
힘든 일을 겪으면서 이런저런 관계 정리가 된 시기이기도 하지만, 뒤돌아보면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아빠가 떠난 뒤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경황이 없어 한분 한분께 감사를 표하지 못해서 죄송할 뿐이다.
아빠의 장례식에 오셨던 아빠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아빠가 나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이야기해주셨다. 아빠와 많이 닮은 나를 보면서 나를 안고 우신 분들도 많았다. 그때 나는 넋이 나가 있었고, 너무 많이 울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내가 워낙 티를 안 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던 지인들은, 아빠가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무 놀랐다고 했다.
| 결핍의 부작용
병으로 괴로워하던 아빠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서 그런지, 웬만한 아픔이나 병에 안타까워하지 않는 부작용이 생겼다. 연세 많으신 분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나, 동년배의 조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호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얼마 전, 지인의 부모 중 한 분이 암 치료를 받게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세가 있으시지만, 다행히 치료 가능한 초기라고 했다. 그분은 병원에 검사하러 가기 전부터, 단톡 방에 상황을 이야기하며 많이 속상했고, 단톡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늦기 전에 부모님을 꼭 병원에 모시고 가라며 당부했다. 아무튼, 모두 위로, 걱정, 다짐 등의 한 마디씩 하는데,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우연히도 그날이 아빠 기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모든 말이 가시처럼 박히면서, ‘검사받고 치료할 수 있는 게 어딘가.’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 속은 정말이지 콩알보다 작은 것 같다.
그래도 동년배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남 일 같지 않다. 특히, 어린 자녀를 남기고 돌아가시는 분의 경우에는 마음이 더 아프다. 부모의 부재라는 결핍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지만, 이런 결핍은 최대한 늦게 겪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아주아주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