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0의 인생
서른
서른을 맞이했다. 정말 아무 준비 없이 덜컥 다가온 서른이라는 숫자.
스무 살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원인모를 위병에 시달리느라 온갖 병원들을 오갔고, 정체불명의 약을 달고 살았고, 그래서 일상생활이 파괴되고 있었다. 대학생활도 즐길 수가 없었다. 누구를 만날 때마다 가장 좋은 나이라며 부러워하곤 했지만, 내겐 그 보다 앞날의 내가 더 걱정이 되었다.
이상은의 노래 가삿말처럼, 젊은이들은 젊은 줄 모른다. 그 젊음으로 인해 얼마나 자신이 예쁘게 비추어지는지 모른다. 실질적으로 피부에 와 닿기까지는 젊음을 떠나야 진정 그 나이의 가치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젊은이들을 보며 그들을 축복한다. 그 누구 하나 자신의 나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진심으로 축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라는 커다란 나무는 그러하다. 내 피부에 새겨진 나이테를 세는 것보다 당장 내일의 할 일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할 터이니. 결국에는 지나고 보면 모든 게 젊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 어떤 나이테를 가진 사람이건, 우리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고 가장 젊고 가장 이른 시기일 것이다.
나의 20대는 불안정한 나날의 반복이었다. 졸업 후, 대부분의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는 예술가의 꿈을 더 꾸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전공에 따라 회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좋은 직장을 다녀도 만족할 수 없었다. 운 좋게 대학시절 만든 애니메이션이 큰 영화제 초청이 되었고, 그 이후 직장을 때려치우고 영화 학교에 다시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 제2막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20대의 반이 남았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유일하게 젊은이의 무기를 썼다고 하면 아마 그때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직장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은 없다. 20대를 지나오며 느낀 것은 무슨 일을 하든 내 뜻대로 되는 일은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이다. 나의 책의 제목(울면서 걷다)처럼 일이 잘 안 풀리면 엉엉 울고, 다시 마음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매일 같이 그랬다. 새로운 도전을 할 때도 지속적으로 나를 시험하고 다그치느라 숨이 막힐 것만 같았고, 학교에서 낮은 평가를 받을 때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잠깐, 지나가도 될까요?
신기하게도, 정말 다 지나간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잔상의 기간은 저마다 차이가 있지만 현재에 살고 있는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나의 시각에 달려있다는 것을 서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것을 조금 일찍 알았다면, 나의 20대는 조금 덜 슬펐을까?
영화를 공부했고, 제작사에서 PD로 일도 했고, 유럽으로 홀로 배낭여행도 갔고,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책도 출간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 버킷리스트에서만 존재하던 일을 이루게 되었다. 처음에는 빨간색이 그저 빨간 색인 줄 알고, 노란색이 노란색인 줄 알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은 무지개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나 보다. 20대는 무지개를 향해 오르는 계단 같은 것이 아닐까.
이번 새해를 보며 소원을 빌었는데, 처음으로 어떤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소원보다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달라는 소망을 품었다. 몸도 마음도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해서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서른의 나이테를 그려달라고 빌었다.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기운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지금 나의 꿈이다.
언젠가 서른이 되면, 20대를 돌아보는 글을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오늘로써 이루게 되었다. 마흔이 되는 날 서른을 내려다보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그때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소원을 이루게 되는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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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0과 1의 순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겪는 고통과 행복 같은 것처럼 영원하지 않다. 서른의 나는 다시 0이 되었지만,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다니며 1이 되기 위해 올해를 보내게 될 것이다.
2020년에도 여미의 브런치를 찾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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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여미
글/그림 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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