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미 Oct 22. 2021

평범한 용기

요즘 나는 그다지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있지 않다(역시나 평범해지기는 참 어렵다)

최근에 십 년 지기 친구들과 갈등을 겪고 난 이후로 감정의 바닥을 찍은 상태에서 미미하게 그 상태로 머물고 있다. 오랜 연애를 하다가 헤어졌을 때도 이 정도로 우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은 아니었는데(아마 그 친구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작은 비구름이 내 주위만 따라다니면서 비바람을 뿌려대고 있었다. 몇 주간 온몸이 차갑게 젖은 상태였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게 커다란 지붕이 사라졌다는 것을


남들에게 말 못 할 가정사나 모든 관계의 괴로움들, 일상 속에서 고통들을 전부 포용하고 응원해주던 친구들과 한동안 소통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커다란 지붕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기와로 촘촘하게 구성력을 더해졌던 지붕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졌다. 무너진 기와 조각들 사이로 비바람과 눈보라가 나라는 사람의 세계를 흔들고 있었고, 알량한 기둥 하나 부여잡고, 떨어진 비닐을 주워다가 온몸을 감쌌지만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남겨진 나라는 사람은, 내가 자신했던 것보다 매우 작았고, 나약하고, 보잘것없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친구들의 연락에 좀처럼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말했던 나의 결점이 전부 맞는 말이었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우리 중에 한 친구에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점을 충고하나 했을 뿐인데, 그게 그 친구의 마지막 인내심을 건드렸는지 10년어치의 서운한 점들을 전부 듣게 되었다. 심지어 다른 친구들까지 합세하여 세력이 확장되면서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고, 혼자 남겨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나의 대화방식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메모장에 장문으로 적어보기도 하고 제삼자인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관련 책들을 무진장 읽었다(가장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나를 돌아보면서, 매우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공감 능력


학창 시절부터 대학교를 지나 현재는 직장인의 삶을 살면서 새로운 사람과 친밀감을 쌓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어느 무리를 가나 늘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생겼고, 나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속 이어가려는 친구들이 늘 있었기에 관계를 쌓는데 항상 우호적인 편이라 믿어왔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니, 나의 공감 능력을 자신해왔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생각이 들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친한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에서 늘 나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생각을 말하면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나의 소신을 관철시키려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착각했다. 우리는 알게 된 지 오래되고 가까운 사람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해해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더 나의 주장을 입증해나가려고 했고, 언제든지 내 곁에 있어줄 사람들이니 소소한 배려에 정성을 쏟지 못했다. 나의 오만이 누군가에게 몇십 년 동안 불편함과 상처를 준 것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냉정하게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생각뿐이었고 결국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을 공감할 생각도 없이 혼자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셀레스트 헤들리의 '말 센스'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견해를 분명히 표현하고 싶다면 블로그에다 글을 써라.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자신의 견해를, 최소한 잠시 동안이라도, 한편으로 치워놓아야 한다. 


그러하다. 나는 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마치 브런치에 글을 쓰듯 대화를 하고 있었다(이것을 이제야 인지하다니 충격적이다). 물론 습관적으로 글을 정돈해서 쓰던 방식이 튀어나온 것이었으나, 나는 나의 이런 접근 방식이 어떤 면에서는 무례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이런 일화를 듣던 제삼자인 다른 친구는 "네가 그랬어? 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대화 방식'을 포함해서 태도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충분히 조절 가능했다.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거절할 때 기분 상하지 않는 면으로 말을 할 수 있는 법도 잘 알고 있고, 때로는 겸손한 태도로 들어줄 때도 필요하다는 것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제일 가깝고 편한 친구들이라는 이유로 어느새 독단적인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화의 절반은 말이 아니었다. 침묵 속에 말보다 더한 공감력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을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했어야 했다. 친구의 잘못된 선택이나 의견에 굳이 나의 신념을 더했어야 했을까, 그러지 않았으면 이런 갈등도 없었을 텐데, 라는 후회가 밀려오면서 이거와는 별개로 평소 이런 나의 허물을 품어주었던 친구들의 사랑에 비해 내 마음의 그릇은 비교적 작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말 센스가 빵점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자존심을 세우느라 본질을 보지 못했다. 이외에도 나는 약 10 페이지가 넘는 문서에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숨도 쉬지 않고 적어냈다. 틈이 날 때마다 내가 적어놓은 글을 읽었는데, 객관적으로 본 내 모습이 스스로 너무 추해서 손 발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이거 괜찮은 인간인 건가? (나 같아도 이런 평범하지 않은 인간과 친구를 안 하고 싶을 것 같은데 어떻게 17년 세월을 함께 했는 지도 의문이 들 정도다) 이 정도로 마음이 넓은 친구들이었는데, 어떻게 인연을 함부로 끊을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여울님


기나긴 자아성찰의 시간이 지나고(글쓰기는 내게 역시 많은 도움을 준다), 나의 행동에 변화가 생겨났다. 

남일에는 무관심했던 내가, 하나둘 씩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의 다른 팀 부서장님이 부친상을 당하셨는데, 나와는 업무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1년에 한두 번 주변을 스쳐 지나가다 얼굴을 볼 정도였다. 근무하는 건물도 달라서 더욱더 접점이 없었다. 회사 메신저로만 서로 성함을 알고, 직접적으로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지만 회사 공지에 올라온 비보를 보고, 계속 마음이 쓰였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평소에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해서 미안함이 가득했고(지금도 그러하다), 앞으로 조금씩 만회할 기회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아픔이 크게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타인이 느낄 상실감과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코로나라 조문객들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고민을 하다가 팀장님께 개인 메시지를 드렸다. 조금이라도 위로할 방법을 찾고 싶다고. 


팀장님은 본인이 대표로 조문했으니 따로 조의금을 보낼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만, 부서장님이 계신 다른팀 동료에게 다시 사정을 말하고 전할 방법들을 추적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표했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것을 상상하니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아 어떻게 위로의 말씀들 드려야 할지 몰라 따로 연락은 드리지 않았다. 다음 날, 부서장님께서 내게 감사 메시지를 보내 오셨고, 나 또한 마음 깊이 애도를 표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며칠 후, 상을 치르고 복귀하신 부서장님이 우리 팀 사무실에 갑자기 오셨고,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으시더니 인사를 하셨다. 


안녕하세요, 여울님. 


단지 인사였을 뿐인데도 한동안 나를 바라보시던 그분의 눈빛과 목소리 톤, 고요한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위로해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잘 돌아왔다고, 감사 인사하러 왔다고. 그분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주셨고,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셨다. 팀장님과도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신 후, 돌아가실 때도 내 눈을 보고, 따뜻하게 인사하셨다. 여울님, 가볼게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가 지금까지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공감해주고 베풀어주고 참여한 적이 있었을까, 라는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감사 인사를 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또, 이런 감정이 너무 오랜만에 느껴본 지라 여태껏 남을 많이 도와준 적이 없었음 또한 깨달았다. 큰 용기가 아니더라도, 이런 평범한 용기로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평범한 용기


나의 결점을 지적해준 친구들에게 다시 손을 내밀고 관계를 회복할 용기를 내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안의 삐죽이가 튀어나와 그들이 밉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의 결점이 밖으로 드러났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소외감으로 도망가버리고 싶었다(사실대로 말하면 도망갈 곳도 없긴 하다). 그러나 이런 복잡하고 미운 감정들과는 계속 멀어지려고 노력 중이고, 언젠가는 완전히 던져버리기로 했다. 나는 그들 덕분에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고, 이 변화로 인해 내 삶에서 스스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나 확연했기 때문이다. 


한번 틀어진 관계 개선을 하는 것에 대해 알량한 자존심이 방해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나만 없으면 그들은 행복할 거야'라는 비관에 빠져 계속 망설이고 있었지만, 어제 부서장님의 인사로 많은 생각을 했고, 퇴근을 하는 지하철 안에서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다음 주에 얼굴 보며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이렇게 나는 두 번째 평범한 용기를 냈다. 아직도 많은 부분에 대해 깨우치지 못했고, 나 또한 불완전한 인간이니 완벽히 변할 수는 없겠지만, 두 번 다시는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편하다고, 가깝다는 이유로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말하려는 것보다 들어주기 

해결책보다 온기를 주기

사소한 감사 표현은 꼭 해주기


그리고, 나를 귀하게 대해준 만큼 나도 다른 사람을 귀하게 대해주기. 

평범한 나, 늘 기대하고 있어!




글/커버 사진 여미

yeoulhan@nate.com


가까운 사람에게 평범한 용기를 낸 적이 있나요? :) 

이전 08화 따뜻함이 필요할 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