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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Oct 10. 2021

따뜻함이 필요할 때

평범하지 않은 날

사람의 마음속에는 슬픔을 보관하는 작은 우물이 있다.


슬픔이 차오를 때마다 눈물로 급하게 번지지 않도록 작은 우물에 가둬놓으려고 한다. 쉽게 울어버리면, 나 혼자만 알고 있던 이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인정해버리는 거니까, 나 역시 강인하지 않고 나약한 사람임을 이 세상은 알게 되는 거니까. 그렇게 작은 우물 안으로 차곡차곡 슬픔을 숨기고 숨기다가 비로소 전부 숨기지 못하고 넘쳐흘렀을 때, 단단하다 믿었던 우물의 성질 또한 변질되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이 절절하고도 아슬아슬한 외로운 독주는 그렇게 눈물이 터져 나옴으로써 막을 내린다. 생각보다 후련하고, 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애써 감추고 싶어 진다. 결국 오늘도 이렇게 엉망이 되어 끝을 보고서야 깨닫는다. 내가 쏟은 정성을, 진실한 마음을, 그리고 애정을.


따뜻함이 필요할 때


이처럼 평범하지 않은 날이 있다. 늘 평범했던 관계가 한순간에 틀어지고,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들이 미워지고, 진실한 마음을 교환하고자 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것 같고,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지 못하는 감정이 들었을 때, 늘 평온했던 우물은 혼자 바빠진다.


오랜 세월 관계를 지속해왔던 친구들과 크게 다투었다. 친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시비를 가려주고 충고를 해줬지만, 나의 정성에 비해 가벼운 피드백과 회피에 실망하고 화가 나 감정적으로 번지고야 말았다.


친한 친구들을 '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배려를 기초로 말하지 못했다. 거리감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개입 조차 안하거나 가벼운 조언 정도로만 끝났을 일인데 나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쓴소리를 하느라 감정을 살피지 못했었다. 이번에도  혼자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라고 발언을 하면서 시작된 논쟁이 그들에게는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상처를 주었나 보다.  17  소꿉친구들 사이에서, 외로운 논쟁을 벌이다 "  친구를 품어주지 못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집 근처에서 산책을 하며, 그들이 내게 해 준 지적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동안 번번이 이런 식으로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며 시비를 가리는 쪽은 내 쪽이 많았고, 워낙 오래된 사이니 시간이 많이 흐르기 전에 금방 화해를 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내 쪽에서도 충격을 받았나 보다. 나의 조언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기쁨을 많이 느꼈나 보다. 그렇게 나와 다른 가치관의 사람과도 조화롭게 잘 맞춰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혼란과, 내가 이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슬픔이 몰려왔다.


분명, 이들이 내게 지적해준 모든 말들은 맞다. 나는 친한 친구들에게만큼은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한 소리를 자주 하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살피기보다는 사리를 분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종종 상처를 주는 말들을 했다. 기분이 상하지 않게 부드럽게 말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해서 상처 준 것도 미안하고, 내 충고를 무시하더라도 서운하다는 표현 정도만 해도 됐었는데 답답한 마음에 계속해서 주장을 정당화했던 것도 선을 넘은 게 맞다. 모두 맞는 말인데, 내 안의 우물이 슬픔으로 가득 차 올라서 하루 종일 속상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야 이 슬픔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 것 같다. 처음으로 ‘우리’ 안에는 내가 없었고, 혼자 남겨진 기분을 느꼈다. 바람 하나 불지 않았는데도 너무 추웠다.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날이 있다. 나의 고충을 늘 곁에서 들어주고, 늘 응원과 용기를 주었던 친구들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스스로도 땅굴 속으로 파고드는 날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김치찌개가 너무 먹고 싶은 거다. 집 앞에 자주 가는 분식집에 들어가 김치찌개를 시켰다. 혼자 살면서, 누군가가 끓여준 찌개가 참 그리웠는데 오늘따라 너무 따뜻하고 맛있는 거다. 너무너무 따뜻해서 마음까지 따뜻해지고, 그러면서 우물 속에 슬픔들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2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혼자 길을 잃은 바람에 하루 종일 굶었던 적이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결국 찾아 들어갔던 한식당이 생각났다. 그때도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너무 따뜻하고 맛있어서 몸의 온기를 찾았던 기억 또한 떠올랐다.


내가 따뜻함이 필요했구나, 간절했구나, 그럴 땐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되는구나.


늘 내 마음과 정신, 그리고 모든 관계나 사랑이 평범할 순 없다.

그렇지만 내일은, 모레는, 글피는 꼭 평범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평범한 하루, 돌아오길 기대해!


글 여미

커버 사진 여미 "오스트리아 하늘"

yeoulha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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