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채소를 위한 저녁 루틴
막막해지는 순간, 집에 가면 뭐먹지?
누구나 진상같은 하루를 보냈을지라도 퇴근길만 되면 솜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별 생각없이 매일 오가던 퇴근길에서 내 에너지를 체크해본다. 발길은 항상 가벼웠지만 되풀이 되는 감정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막막함이었다. 이유는 딱 하나, 집에 가면 뭐먹지?라는 고민때문이었다.
대체로 이 생각은 집에 재료가 정말 없거나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 주로 찾아온다. 주로 집근처에서 장을 보면 저녁시간이 늦어지고 에너지는 고갈된다. 막막함을 회피할 가장 빠른 방법은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떡볶이 또는 뭐 동네 초밥 테이크아웃하기였다. 앗, 그리고 지하철입구에서 만나는 빨간색 차 타코야끼정도로 떼우곤 했다.
충분히 무언갈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데
굳이 테이크아웃 음식이 내게 필요한가?
딱 30분만 요리하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지키려고 하는 요리루틴이 생겼다. 여러 시도 끝에 나는 30분안에 요리를 마치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다. 귀찮은 직장인이라면 더더욱 요리하는 시간이 짧고 쉬워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퇴근 하면 6시. 집에 도착하면 7시 20분쯤. 간단히 씻고, 부엌에 서면 7시 30분이다. 딱 8시쯤에는 밥을 먹어야 내 저녁시간이 여유있었다. 어쩌면, 샐러드가 30분안에 마치기 가장 좋은 음식이라서 선호하게 된지도 모르겠다. 이래나 저래나 나는 딱 30분. 그 안에 요리를 끝내야 기분이 좋았다.
재료부터 친해져야 어떻게든 먹겠지
내가 하고자 하는 요리에 정답이 필요할까. 가끔 이건 어떻게 해먹는 채소인가 주방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고 찾아보기도 한다. 결국엔, 어떻게든 먹겠지. 나만의 샐러드에 기본 재료는 로메인과 루꼴라같은 잎채소를 활용하되 다양한 채소를 사서 시도해본다. 생협 매장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쥬키니호박 하나에 눈길이 갔다. 쥬키니 쥬키니. 이름이 이렇게 귀여운 호박은 어떤 맛일까. 광화문 힐사이드테이블 샐러드맛집에서 먹은 펌킨 라자냐가 문득 생각났다. 그 펌킨 라자냐가 말하는 호박은 늙은 호박이었을까. 쥬키니호박이었을까. 애호박일까. 무엇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쥬키니호박을 다이소 채칼로 썰어보았다. 얇고 길쭉한 쥬키니호박이 재밌는 모양이 되었다.
적양배추 한통, 아직은 나에게 어려운 채소
최근 초간단한 요리를 직접 해나가면서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나를 마주한다. 한번은 처음 만져보는 채소를 사들고 왔다. 그건 바로 적양배추였는데 회사에서 몇 분이 유산균 폭탄이라 불리우는 사우어크라우트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호기롭게 그 야채를 에코백에 넣어 집에 모셔왔지만, 보라색 적양배추를 채 썰다가 늘어난 양을 보니 점점 의욕이 떨어졌다. 그러던 중 채썬 양배추에 감자 전분가루를 넣어 양배추전을 만들어 보았는데 꽤 맛있는 조합이었다. 처음 보는 채소를 요리하면서 왜 완벽한 요리가 나오길 기대하는 걸까. 무심코 샀던 채소의 양도 이제 조금씩 가늠하기 시작했다. 남은 양배추는 냉장고에 두었지만, 혼자사는 1인가구에게 보라색 양배추 한통은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제 깨닫고 있다.
대단한 게 아닌 것 같지만 대단한 식사의 태도
최근 보는 프로그램 중 하트시그널에 나왔던 출연자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렌즈라는 프로그램을 종종 본다. 아마도 내가 그들의 일상이 재밌는 이유는 여자 남자할 것 없이 스스로 자신의 식사와 몸을 책임지는 모습에서 무언갈 느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의미있는 저녁을 만들어 먹는 모습.
또 하나의 최애 프로그램 중 하나인 편스토랑을 보다 보면 음식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른 것을 느낀다. 어남선생의 어떻게든 맛있게 만들고야 마는 정성가득 집밥요리부터, 이요리님의 새로운 요리 실험정신을 볼 때면, 단순히 요리 실력을 떠나 그 사람의 태도가 보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본인의 주방에서 혼자만의 막막한 시간들을 대하면서 자연스레 쌓여온 실력들이 아니었을지.
내가 원하는 건 소중한 저녁시간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감각이 아닐까.
서툴어도 그렇게 막막함을 헤쳐가면 내 안에 조금씩 경험이 쌓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