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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유록 Apr 06. 2022

계획표 쓰기를 멈추고 사표를 썼다

프롤로그

 원하는 인생을 너무 자주 계획해서 어느새 내 인생에 질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계획표 쓰기를 멈추고 사표를 썼다.



일 할 때 화가 자주 치솟았다. 그러다 결국 나 자신이 싫어졌다. 내가 누굴 교정하고 탓할 자격이 있나. 나의 불행에 대한 혐오를 다른 이를 핑계 삼아 불만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평가하면서 작아진 나를 한껏 부풀렸다.




이러다 펑 터질 것 같아서 유튜브로 해결책을 찾아 사무실 내 자리에 좋아하는 사진도 붙여보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일했다. 지금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좋아하는 것을 일에 더해보라고 하길래.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했고, 배울 점을 찾아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솟아났던 의욕은 파도보다 더 쉽게 휩쓸려갔다.




 의욕이 휩쓸려간 자리엔 열등감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이 나이에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이것밖에 되지 못한 것에, 내 또래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을 한탄했다. 심지어 드라마 캐릭터를 보면서도 열등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모두 달라졌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았다. 나는 무가치하고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열등감을 이불 삼아 덮고 밤을 지새웠다. 일의 주도권이 내게 없는 것도 싫었고,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도 싫었다. 친절한 척하며 업무 전화를 받다 보니 피로도가 엄청났다. 하지만 혼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게으르게 허송세월만 보내고 월급조차 못 받는 백수가 되는 것이 죽기보다 무서웠다. 어떻게 나를 먹여 살리며 자부심을 느끼며 살 수 있을지 막막했다. 창조적인 일을 하며 아웃풋을 내고 싶었지만 두려웠던 나는 열등감과 팔짱을 끼고 이인삼각을 하며 헛둘헛둘 회사일로 도망치고 있었다.




 퇴근 후엔 입은 옷 그대로 방바닥에 누워서 과자를 씹었다. 하고 싶은 일을 더 하기 위해서는 체력을 키우던지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늘 손에 쉽게 잡히는 해결책에 내 기분을 맡겼다. 재미있는 영상물을 보거나 책을 들이켰다. 책으로 영화로 인터넷 강의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넣는 것으로 창작에 대한 두려움을 눌렀다. 그것들은 내 고민이 무엇인지 다른 애들한테 떠벌리지도 않고, 그것도 모르냐며 손가락질하지도 않으니까. 아직 준비가 안되었어. 이것만 더 읽고, 이것만 더 배우고.




정말 고마웠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찾는 답은 그곳엔 없다는 것을.



지금 가진 것으로 당장 시작해야 했다.







하루는 풋잠(내 친구 이름이다)이 수다를 떨다 물었다.


"죽어가는 사람.. 본 적 있어?"

"아니요."



"난 봤거든, 암이었는데 그 친구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뭔지 알아?"

"뭔데요?"

"후회"



"인화야, 너는 뭘 제일 후회할 것 같아?"





클리셰 같은 풋잠의 이야기.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날은 말의 힘이 셌다. 어쩌면 99도로 끓던 나에게 1도를 더해줘서일지도.




풋잠과 이야기를 마치고 무엇에 대해 가장 후회할지 머릿속을 뒤적였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먼지 한 줌과 글뿐이었다. 생각보다 더 글이 쓰고 싶구나. 너무 뜨거운 마음이 꼭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10대나 20대로 돌아간다면 돈과 시간과 체력을 아껴서 여행도 많이 가고 경험도 많이 쌓고 싶지만,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글을 쓰고 싶다. 불안정한 연애를 끝내고 울던 나도, 고시 공부를 하겠다며 좁은 책상에 앉아 있던 나도 사실은 그러고 싶었다. 글을 쓰고 그 글이 그림을 되고 영상이 되고 삶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이 가능한지는 몰랐지만, 그러고 싶었다.






남이 만든 것이 아닌 내가 만든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아 주었다. 매일 끄적이던 노트를 다시 읽고 휴대전화를 가득 채운 사진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네잎 클로버라도 찾을 기세로 기억의 풀밭을 더듬어 보니 어떤 특정 시절 사진   얼굴이 유독 환했고 글도 유난히 많았다. 남해에서 지내던 재작년 가을이었다.





그래, 남해로 가자. 남해로 가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자. 바닷가에서 수영도 하고, 요가도 하고, 영상 제작도 하고, 창작자를 위한 공간도 만들고, 노래도 하고, 해산물도 왕창 먹자.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이 쏟아졌다. 계획표를 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사표를 썼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네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 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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