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풍경 제11화
헤어진 여자 친구들에 대한 험담을 한 적이 거의 없다. '거의 없다'라고 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없는데 나도 모르게 험담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험담'이라는 것의 기준도 애매하기 때문에 나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것을 험담으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없다'는 표현을 썼다.
헤어지는 시점에 화가 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타이밍과 방법으로 이별 통보를 받은 적도 있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다중적인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서 이별을 통보한 적도 있으며, 만날수록 본인 중심적인 모습에 지쳐서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기도 했다. 연인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 부정적인 면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헤어진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강해지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아졌다. 처음에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라고 화를 냈지만, 이성을 찾고 이해되지 않는 그 사람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파고, 파고, 파면서 고민하다 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없더라. 그리고 그렇게 상대가 이성적으로 파악되기 시작할 때야 비로소 그 사람과 마음으로도 이별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으로 이별을 하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은 희석되고 함께 했던 좋은 추억들만 남았다. 그로 인해 가끔은 연락을 해보고도 싶지만 그럴 때면 이성으로 파악한 사실들을 떠올리며 허벅지를 꼬집다 보면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 자체가 내 기억에서 희미해지곤 했다. 아주 가끔, 문득문득 생각날 때가 있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그 사람과 내 사이에서 내가 상대방의 '틀림'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상당 부분은 사실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었단 것이다. 그 다름들 중 작은 것들은 내가 상대에게, 또 상대가 내게 맞춰주면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 작은 다름들이 너무 많거나 너무 큰 다름이 있을 때는 그 관계가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어느 시점에 느껴지기 시작하느냐에 따라 상대와의 인연이 얼마 못 가기도 했고, 예상보다 오래가기도 했다.
우리가 연인에게서 '틀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은 사실은 '다름'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기념일은 챙길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큰 부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걷는 게 데이트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걸으면서 하는 데이트에서 가장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주위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연애 사실을 굳이 주위에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는 반면 어떤 이들은 연애 사실을 주위에 알려 확인시켜줘야 한다. 연인들의 큰 싸움은 대부분 이러한 다름을 틀림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시작된다.
나이가 들수록 결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연애를 하는 것도 힘들어지는 것은 사람들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더군다나 싱글로 나이가 들다 보면 본인만의 색과 루틴, 호불호가 분명해지면서 '다름'의 폭이 넓어지고 그만큼 '다름'에 대한 수용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로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게 되는 영역도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 영역에 대해서는 수용성이 높아지지만 몇 가지 영역에서는 어렸을 때보다 더 까탈스럽고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가 어느 정도 이상인 싱글들은 정확히 말하면 '눈이 높은' 것은 아니다. 이는 나이가 들면서 상대에 대한 조건의 종류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대부분 '더 까다로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그들은 남아있는 조건들에 대해서는 거의 양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싱글만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결혼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오히려 더 부딪히는 경우는 사실 함께 살았어도 그 다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이 계속 본인 개인으로만 살아가고 자신을 만들어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또는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용 가능한 '다름'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수용'은 '그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그 상태로 내 옆에 둘 수 있는 것'이지, '일단은 나와 다르지만 다른 게 괜찮으니 내 옆에 두고 있어 보겠어. 그러다 보면 맞춰지거나 내가 좋다면 본인이 변하고 맞추겠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후자의 생각을 갖고 누군가를 만나는 사람은 결국은 헤어지거나 행복하지 않은 연애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람의 모든 면은 '다름'일까? 내 경험과 주위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그렇다. 그렇지 않은 '틀림'이 있다면 그건 한 가지가 있다. 그런 다름을 다름으로 생각하지 않고 본인의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과 의견은 무시하고 무조건 깔아뭉개는 사람. 상대방이 내게 다 맞추지 않는다고 칭얼대는 사람,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화부터 내는 사람, 상대에게 나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맞추라고 강요하는 사람. 자신은 옳고 상대는 틀리다면서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붙이거나 파렴치한으로 취급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는 절대로 다름일 수 없고 틀린 것이다.
이는 연애는 다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은 연인관계에서 평등해야 한다. 그런데 항상 자신의 방식만 고집하는 것은 본인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고 상대를 대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애초에 연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부터 무시하고 상대를 본인의 도구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틀리고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상대방에게 진실되지 못한 것 역시 '틀림'이지 그것이 '다름'은 아니다. 연인을 사랑한다면, 정말 상대방이 내게 가족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이라면 상대방에게는 진실되어야 한다. 물론, 상대방이 힘들어할 듯해서 모든 것을 말하지 않거나 하얀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하거나 무엇인가를 숨기기 위해서 상대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 외에 연인관계의 대부분은 '다름'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다름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A라는 사람이 그 다름을 B와 해결하는 방법과 C와 해결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 이는 그 조합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연애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와 본인의 다름을 파악하고, 그 다름이 서로에게 수용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게 수용 가능하다면 두 사람은 누구보다 가까운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은 빨리 헤어지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다름과 수용성은 상대가 살아온 인생을 함께 들여다보면서 파악할 수 있다.
연애는 이처럼 관계가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감정적인 영역보다 이성의 영역을 더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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