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풍경 제12화
시리즈로 연재하는 글을 쓸 때 내가 초반에 세팅한 목차를 우선 확인한다. 그 목차를 썼을 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를 돌아보고, 그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글을 정리해 나간다. 글을 쓰는 그 자체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는 지난 3년간 다양한 글을 브런치에서 쓰면서 생각이 어느 정도는 정리되었고, 그걸 정리해서 목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30대 후반의 미혼이며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새롭게 정리되는 것들이 있다. 다시 글을 쓰면서 나의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대해 고민을 하다 보면 더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고, 그 과정에서 정리되는 생각들이 있다. 아주, 매우, 가끔씩 그런 고민 중 한 가지가 정리되는 시기와 내가 써야 하는 글의 주제가 겹칠 때가 있다. 내가 쓰기로 한 목차를 확인하고, 그 고민과 목차가 맞아 들어가는 드문 경험을 하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오늘, 방금 그랬다.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할지는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부분 사람의 고민일 것이다. 결혼한 사람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 살기로 한 결정이 맞았을까?'를 고민하며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한 사람들은 본인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사람을 만나라, 이런 조건을 봐라, 이런 게 중요하다는 식으로 가르침을 하사하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조언은 대부분이 스펙이나 배경, 심지어 외모와 관련된 것인 경우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30대 후반의 미혼으로 살아남다 보면, 그런 조언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듣게 된다. 지겨울 정도로.
그렇게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 친하지 않은 사람이면 나는 그저 '네, 네' 하면서 속으로 '그런 얘기 지겹게 들었어. 당신만 아는 얘기처럼 하지 마'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친한 사람이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라 지겹다. 내 일이야'라고 잘라내며, 정말 친한 사람이면 '그 30대 후반에 싱글 안 해봤지? 30대 후반의 싱글만 알게 되는 게 있고, 당신은 당신 경험만 바탕으로 말하는 거야. 너무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는 말자'라고 솔직히 얘기한다. 그게 나의 가장 솔직한 마음이다.
나도 스펙, 배경, 외모 다 따져봤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이상한 '배우자 기도' 문화에 잠시 흔들려서 20대 초반에는 조건을 20개 정도 써봤던 적도 있다. 그 경험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이후로 연애와 소개팅을 하는 과정에서 그 조건들을 하나씩 삭제해 나갔고, 30대 초반 정도가 되었을 때는 '조건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도 다른 요소들이 어떻게 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 전혀 의미가 없을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아 더 이상 조건을 나열해서 사람을 만나지는 않게 해 줬으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의 조건을 써보는 게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 조건의 종류와 성격이 그 사람의 현재 모습과 가치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조건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시간과 경험에 따라 변하고, 위에서 말했듯이 같은 조건도 다른 요소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 수 있다.
내 경험으로는 본인에게 정말 중요한 것 몇 가지만 하한선을 두고 나머지는 직접 만나보고 상대가 나의, 내가 상대의 어떤 면을 끌어내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이는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과 있을 때와 C라는 사람과 있을 때, B와 C는 D 또는 E라는 사람과 있을 때 다른 모습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와 있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나오면 나 자신도 가장 행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의 좋은 면을 끌어내 주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여기까지는 30대 초반에, 모든 조건이 삭제된 시점에 내가 했던 생각이고 그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이 시국에 조심스럽게 지난 주말에 소개팅을 하면서 '내 현재와 미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게 가장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는 사람들이 부부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결혼하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상호 간에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개인의 영역과 특징을 갖고 살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상대와 나의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하고,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맞춰가면서 상대와 나의 다름이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연인 또는 부부가 싸우거나 헤어지는 패턴을 보면 그 안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두 사람 중 최소한 한 사람이 관계를 본인 중심으로 끌고 가다 상대 또는 두 사람이 모두 지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애초에 왜 만났을까? 상대의 매력적인 부분이 상대와 본인의 다름을 보지 못하게 했거나 상대의 다름을 인지했더라도 그게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떤 경우에는 그 다름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앞의 두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을 듯하고, 인간이 가진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다름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 혹은 생각은 다르다. 물론, 상대가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상대를 내 마음대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것이기에 위험하고 폭력적이다.
그런데 우린 생각보다 자주, 그런 폭력적인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소개팅 첫 만남에서는 본인을 너무 드러내지 말라고, 자신을 어느 정도는 숨기고 상대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라는 조언 이면에는 그런 폭력이, 숨어있다. 처음에는 상대가 좋아할 만한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줘, 그리고 마음이 넘어온 이후에는 어차피 다른 건 그냥 넘어가게 되어 있어.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자주 하는 조언.
당장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면 유효한 조언이다. 그리고 나이와 상황에 따라서는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을 수 있다.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그건 어쩌면 '언젠간 헤어질 연애를 시작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일 수 있다. 상대에게 처음부터 내 얘기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 쏟아내는 것도 문제지만, 상대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특정한 사실들을 숨기는 것은 결국 그 관계가 그 사실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거나 깨어질 수 있단 생각을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상대에게 나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지이거나 상대가 감정적으로 깊어지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면 상대방이 그 사실을 결국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지금 당장 감정적으로 상대에 빠져있을 때는 마음에 걸리는 듯해도 결국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커플들은 결국 처음에 마음에 '조금' 걸렸던 그 요소가 일으킨 나비효과로 인해 헤어진다. 지금 당장 연애를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나와 상대를 받아들이고, 그 '조금' 마음에 걸리는 요소가 나와 상대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이상형과 이상향에 대한 글을 얼마 전에 썼다. 지금 내게 이상형을 꼽으라면, 그건 내가 가는 길 끝에 이런저런 게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믿고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30대 후반의 싱글들은 자신이 정말 가고 싶은 길이 명확하거나 딱히 뭘 하고 싶지도 않은데 현실은 싫은데 현실적인 것은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고 특이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 길을 가는 이유에 공감해주며 함께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상대의 인생에 대해서도 내가 그렇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평생 함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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